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엘리사벳 씨튼(1)[54]

모든 2 2020. 5. 25. 21:53

한진섭 「엘리사벳 씨튼 성녀와 소녀」(부분)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가족의 죽음일 것이다. 미국 최초의 성녀 엘리사벳 씨튼은 부모,자식,남편 등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녀는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의 죽음까지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고통을 은총으로 승화시켰다.

  엘리사벳 씨튼은 1774년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나 세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당시 그녀에겐 언니와 갓 태어난 동생이 있었다. 어머니가 사망한 지 1년 후 부친은 샬롯 에밀리아 바클리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새엄마의 외가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가문이었으니 미국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씨튼의 부친은 외과의사로 뉴욕시의 첫 보건소장을 지낸 천재 의사였다. 엘리사벳이 네살 되던 해 동생이 사망했는데 씨튼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현관 앞 층계에 혼자 앉아서 구름을 쳐다보며 두 살 난 꼬마 동생 키티를 관 속에 넣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동생이 죽었는데 왜 울지 않느냐고 묻자 키티는 천국으로 올라갔으니까요. 나도 엄마가 있는 그곳으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엘리사벳과 새엄마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엘리사벳은 '가정 불화가 있었다. 나는 다른 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는데 그들은 왜 내게 대답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회상했다. 오직 한 분,변함없는 하느님께로 나아갔다.'라고 썼다.

  1794년 1월 25일 20세의 엘리사벳은 윌리엄 매기 씨튼과 결혼했다. 씨튼-매틀랜드라는 회사를 운영했던 당시 뉴욕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던 기업가 가문이었다. 결혼 한두 해 전 엘리사벳과 윌리엄은 뉴욕에서 상류층 사람들이 즐기던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등 낭만적인 데이트를 즐겼다. 엘리사벳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속적 행복을 누린 짧은 기간이었다. 첫딸 안나가 태어났고, 1796년 둘째 윌리엄을 임신했을 때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가문의 기둥인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802년에는 부친이 임종했다.

1803년 엘리사벳은 남편 윌리엄의 결핵이 악화되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탈리아에 있는 남편의 친구 필리치 가족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이탈리아의 따뜻한 공기를 마시고 설령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고 싶은 마음때문이었다. 어린 자녀를 두고 뉴욕을 떠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큰딸 안나만 데리고 갔고, 둘째,셋째 넷째는 시누이이자 친구에게,막내는 언니에게 맡겼다. 당시 항해는 매우 위험했으므로 죽음을 각오하는 여행이었다. 떠나면서 손수건을 흔드는 친구에게 '내 아이들을 네 가슴에 자주 안아 다오!"라고 부탁했다. 뉴욕을 떠나면서 엘리사벳은 친구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떠남을 말해 주었다.

   따뜻한 나라를 향해 목숨을 걸고 떠났건만 정작 그들을 기다린 것은 난방도 되지 않는 차디찬 맨바닥에 감금되는 일이었다. 황열병 전염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감옥과 다름없는 쇠창살이 있는 시설에 감금된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가장 적나라한 상황을 엘리사벳은 차가운 감금 시설 속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너무나 가혹했지만 죽음이 곧 하느님과의 만남임을 이때 깨달았다. 견딜 수 없는 고통조차 하느님의 뜻이자 사랑의 표현임도 알게 되었다. 엘리사벳이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의 극단적인 고통을 겪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고종희 마리아/한양여대 교수,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