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하우스 내의 성녀 기도방,에미츠버그
성녀 엘리사벳 시튼은 이탈리아에서 남편을 잃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엘리사벳은 1806년 6월 20일 개종했다. 그녀는 자신을 박해는 프로테스탄트 친척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뉴욕을 떠나 볼티모어를 거쳐 에미츠버그에 도착했다. 남북전쟁의 전쟁터였던 게티츠버그 근처다,1809년 3월 25일 에미츠버그의 수도원에서 청빈,정결,순명을 서원했으며 이때부터 마더 씨튼으로 불렸다. 씨튼 수녀회가 창설된 것이다.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각지에서 온 열한 명의 수녀가 스톤하우스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 무렵 엘리사벳은 올케이자 절친이었던 레베카와 큰딸 안나를 잃었다. 안나는 이탈리아 여행 중 남편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같이 지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통했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분신이었다. 인간적인 고통은 그녀를 참을 수 없이 아프게 했지만 죽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별의 아픔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씨튼 성녀는 성모신심과 성체사랑이 지극하여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영했다고 한다. 그녀는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알았기에 "감실 건너편에 앉아 있거나 서서 일을 할 때에도 내 마음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라고 술회했다.
1812년 막대딸이 사망했고,그녀를 가톨릭으로 안내한 이탈리아에서 만난 필리포 펠리키씨도 그해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이들의 연이은 죽음에 대해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들을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기쁨을 느낍니다."라고 적었다. 1817년 성 요셉 까리타스 수녀회라는 법인체가 설립되었다. 수녀회가 교회법상으로나 국가법으로 설립된 것이다. 설리목적은 "신심활동과 자선활동,특히 노인과 병들고 허약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과 소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 이다. 1821년 엘리사벳 씨튼은 47세 나이에 미국 에미츠버그라는 시골 마을에서 가톨릭수녀로 세상을 떠났다. 씨튼 수녀회의 모원은 에미츠버그의 성 요셉 수녀원이며 이후 뉴욕,필라델피아에 분원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 씨튼 수녀회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논산,강진 등에 씨튼 수녀원이 있다.
몇 해 전 씨튼 성녀가 살았으며 수도회를 설립한 미국 동부의 에미츠버그를 방문했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자 엘리사벳 씨튼로(avenue elizabeth seton)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40킬로미터가 넘는 긴 길로 기억한다. 표지판을 보니 눈물이 났다. 뉴욕에서 볼티모어로,다시 이 낯선 곳까지,여인의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도 없던 시절이니 마차를 타고 가셨겠지.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씨튼 성녀가 수녀원을 설립한 미국의 시골 마을 에미츠버그까지 찾아가 성녀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베푼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명화로 읽는 성인전>의 원고를 거의 마무리 하고 있었는데 서울의 씨튼 수녀원에서 조각가인 남편에게 씨튼 성녀상을 의뢰하였고, 그래서 씨튼 성녀를 알게 되었다.
책이 출판된 이전과 이후에도 나는 내 책에서 언급한 작품이나 작가의 생가 또는 활동지를 거의 다 가서 확인했다. 수백 곳이 넘을 것이다. 비오성인이 살았던 산조반니 로톤도라는 이탈리아의 산골 마을을 차도 없이 찾아간 것도 잊을 수 없는 방문 중 하나다. 성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분들이다. 대전교구 주보에 1년간 이들 성인들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발자취를 연재한 것은 영광이었다. 이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대전교구 모든 분께 깊이 감사 드린다.
-고종희 마리아/한양여대 교수,미술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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