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43]

모든 2 2020. 6. 8. 12:19

도나델로「성모마리아와 성 안토니오」1446~53,파도바,성 안토니오 대성당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 안토니오(1195~1231)는 포르투칼의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페르난도이며 어린 시절 고향인 리스본의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수도회로 옮겨 8년간 수도회 생활을 하며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토니오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1220년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무슬림에 의해 순교 당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의 유해가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수도회 성당에 도착한 것이다. 그 순간 안토니오는 선교를 떠나 순교하고픈 마음이 불타올라 성 십자가 수도회를 탈퇴하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그는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선교를 위해 마로코로 떠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열로 인해 돌아와야 했으니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성 안토니오와 성 프란치스코는 동시대를 살았다. 안토니오는 1221년 아시시 근교의 포르치운쿨라에서 개최된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의 총회에 참석했으며 그때 두 사람은 만났을 것이다. 아마도 서로의 마음을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을까?

 

  1226년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안토니오에게는 어려운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녹여내는 탁월한 설교 능력이 있었다. 그가 설교하면 드넓은 광장이 군중으로 가득 메워졌다고 한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남자들은 가게 문을 일찍 닫았고, 여성들도 광장과 교회를 찾았다고 한다. 인기 드라마 상영 시간에 수도꼭지가 잠기는 현상이 그때 파도바에서도 벌어진 것 같다. 그의 설교를 들은 대중은 변해 갔다. 서로 싸우던 귀족들이 화해했고, 남의 물건을 훔친 이들은 성인 앞에서 사죄하며 물건을 돌려주었다. 안토니오 성인은 특별히 고리대금업자들의 부당함을 고발하였으며,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청산한 자는 감옥에 가지 않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법은 개인파산구제법의 초기 형태로써 이 법안의 사본은 현재 파도바의 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파도바 대성당은 안토니오 성인이 살아 있던 1229년에 착수하여 1263년에 1차 건축이 완성되었다. 이곳에는 설교로 명성을 날린 안토니오 성인의 혀와 턱뼈를  비롯한 유골들이 모셔져 있어서 이들 유물을 공경하기 위한 순례객들로 성당 안은 늘 붐빈다. 성당 내부를 순례한 후 성당 안쪽에 위치한 뜰 쪽을 향하면 아름다운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대성당이나 수도원에는 이 같은 사가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대형 정원이 하나씩 있기 마련인데 파도바 대성당에는 이런 정원이 무려 네 곳이나 있으니 성당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 안토니오 대성당,1차 건축(1229~1263), 이탈리아,파도바

 

  위의 사진은 한 중정에서 바라본 대성당의 모습이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광장에는 르네상스 조각의 선구자인 도나텔로가 제작한 <가타멜라타>라는 용병대장을 청동조각으로 제작한 대형 기마상이 있다. 이 작품은 고대 이래 최초의 기마상으로 꼽힌다. 당시의 성당은 미사를 드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기에 종교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시민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기념비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도나텔로는 안토니오 대성당의 청동제대도 제작했다. 위의「성모마리아와 성 안토니오」는 제대의 일부로 성모마리아를 중심으로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와 백합과 성경을 들고 있는 성 안토니오의 모습이다. 두 성인 모두 프란치스코회의 작은 형제회 복장을 하고 있으나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안토니오 성인을 프란치스코 성인보다 젊게 표현함으로써 서로를 구별할 수 있게 하였다.

 

-고종희 마리아/한양여대 교수,미술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