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아시시의 빈자 성 프란치스코(1)[23]

모든 2 2019. 10. 13. 21:03




치마부에「성모자와 천사들과 성 프란치스코」중 성 프란치스코(부분)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교황 명으로 선택한 첫 번째 교황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온 성인 중 한 분임에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야 그의 이름을 선택한 교황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막상 이 성인을 따라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1282~1226)는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본받고자 했다. 그는 아시시의 부유한 섬유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하느님께 선택되어 세속을 떠난 후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도 그렇게 살았다. 그는 깊은 산 속에 기도하러 들어가면 집은 커녕 몸 하나 겨우 피할 정도의 좁은 바위틈에서 돌베개를 베고 잤으며, 극소량의 날음식을 먹었고, 몸이 극도로 허약해지면 약간의 익힌 음식과 포도주를 마셨다고 한다. 평생 입은 옷은 서너 벌이나 되었을까? 더 이상 기워서 입을 수 없는 누더기가 그의 삶을 말해준다. 이보다 더 가난할 수 없고, 이보다 더 겸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을 사랑했으며 복음을 따라 살고자 했다. 동물들도 그에게 감동하여 포악했던 늑대가 유순해졌는가 하면 새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창조물이었기에 그는 벌레 하나도 살생하지 않았으며, 자연을 사랑했다. 그가 오늘날 환경의 주보성인인 이유다.

  교회가 부패하고, 세속화되었던 시절 프란치스코의 등장은 엄청난 반항을 일으켰다. 굳이 개혁을 말하지 않아도 삶 자체가 개혁이었기에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가 창설한 프란치스코회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 복음을 실천하는 것을 모토로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성인으로 시성되기 위해서는 빨라도 몇십 년, 길게는 몇백 년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프란치스코는 선종 불과 2년 후인 1228년에 시성되었으니 그가 당대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케 한다.

  이탈리아에는 유서 깊은 도시들이 많이 있지만 성 프란치스코(1182~1226)의 고향 아시시는 소도시임에도 성인 덕분에 일년 내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아시시 대성당은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첫 주춧돌을 놓았고 1253년에 건축이 완성되었다. 이 성당은 지상층과 지하층으로 되어 있으며 1290년 이후부터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인테리어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에 벽화를 그린 미술가는 치마부에와 조토다. 두 사람이 출현하기 전까지 미술사는 대부분 무명 예술가들의 역사였으나 이들을 시작으로 미술사는 이름을 빛낸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되었다.

  그 첫 주인공인 치마부에는 아시시 대성당의 지하 성당에 성모자가 천사들에 둘러 싸여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들의 오른쪽에 성 프란치스코가 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성인의 상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이미지다. 성인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복장을 하고 있으며 오상을 받은 양손과 양발, 그리고 옆구리가 잘 드러나 보인다. 성인이 사망한 후 60년쯤 지나 그렸으니 성인을 알고 있는 생존자들의 기억을 참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 모습이 오늘날까지 그토록 많이 쓰이게 될 줄은 화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성인을 그린 덕분에 화가 치마부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에 이름을 알린 첫 화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