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11호에서 발췌

모든 2 2018. 12. 2. 21:30

 

  [청년 칼럼]

 

 

'남이사'정신을 기르자

  얼마 전에 어떤 면접 자리에 갈 일이 있었다. 참고로 내 키는 176센티미터이고,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키가 몇이에요?"다. 그래서 키에 대해 알려 주는 일도,내 키를 듣고 놀라는 감탄사를 듣는 일에도 익숙하다. 나를 처음 본 면접관께서 딱딱한 분위기를 풀 생각이었는지 키를 물으셨다.  "키가 몇이예요?"  "176입니다."  다음에 보통 나오는 말은 "생각보다 크시네요."라거나 "뭘 먹고 그렇게 컸어요?" 이기 마련이고,아마 바람직한 것은 처음부터 키처럼 외모와 관련된 사항을 묻지 않는 것이리라. 어쨌든 이대화가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으련만,면접관은 내가 결혼을 했는지 묻고는 "키가 커서 남자를 만나기 힘들겠어요, 허허"하고 나의 연애사정을 염려하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물론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결레라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면접장을 나오면서 '다음번에 또 누가 결혼했냐고 물으면 파혼했다고 대답해야지.'하고 굳게 다짐했다.  애석하게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평상시에 화장이나 머리에 신경 쓰지 않고 다니는 편인데,수시로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화장 좀 하고 다녀," "화장을  안 하니까 아파 보이네," "어라,오늘은 치마를 입었네," 꾸며도,안 꾸며도 따라오는 말들이다. 한번은 성당에서 저런 말을 들었는데 참지 못하고 말해 버렸다. "이제 제 얼굴 말고 영혼을 좀 보시겠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이는 "무서워서 뭔 말을 못하겠네!"라고 받아칠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할 때,일말의 두려움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말이 항상 의도한 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말이다. 외모나 차림에 대한 말은 어찌되었든 일종의 '평가'이고,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기분 좋은 말이 될 수도,지적질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 영화 속 우아한 주인공들이 만나서 날씨 이야기부터 하는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상황과 상대에 따라 미묘하게 당연히 들여야 하건만,보통은 목적도 없이 키나 결혼 여부를 묻고도 좋은 대화였다고 착각한다.  화장이나 옷차림에 대해 수시로 평가받는 건 단연코 여성이다. 얼마 전 한 배우와 가수의 사진을 두고 살이 쪘다느니,성형한 것 같다느니 댓글마다 호들갑이었다. 그 배우는 '아픈 것도 아니고,성형한 것도 아니고, 밥을 많이 먹어서 살이 쪘다'고 오히려 쿨하게 답했다. 남자 배우가 살이 찌면 '입금 전'몸매라고 포장할 뿐,자기 관리에 실패했다고 혀를 차지 않는다. 그런데 여성의 외모에 대해서는 다들 뭘 맡겨 놓기라도 한 듯 쓸데없는 참견이 너무 많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남이사'정신인 것 같다. 여성이 체중이 늘었든 말든,화장했든 안 했든,사실은 전혀 중요치도 않은 일을 대화 거리로 '소비'하는 걸 언제까지 참아 주어야 하나?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그답게,내가 나답게 살도록 서로 돕기 위해서다.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기준으로 상대를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박유형: 기본소득 청소년 네트워크  운동,대학원에서 신학공부 중,잘 훈련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다.

 

여성과 대화해야 성직자주의 극복된다독신제,세속화,교회의 여성화의 관계
인터뷰 - 루체타 스카라피아

 

2016년 10월,역사학자 루체타 스카라피아.(사진 출처=LA CROLX)

  (<라크루아>) :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자주의'(clericalism)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루체타 스카라피아): 성직자주의는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권력이나 권한을 갖고 있으며, 신자들이 성직자들에 관해 복종하는 상태를 이른다.  무엇보다도, 성직자주의에는 신자들이 성직자에게 순명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보면,독신제가 이런 면을 발전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사실,여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가정생활의 기쁨과 곤경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성들에게 특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부하고 기도하는 일을 하라고 자신들을 축성(봉헌,consecrate)하기 위해, 자신들을 하느님에게 떼어 놓는 일상 문제 같은 것과 거리를 둔다.
  (문) 어떻게 독신제 때문에 성직자들은 독특한 종류의 남성들이 되었는가?  사제독신제가 이르면 7세기부터 시작됐는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당시에는 주교들이 모인 여러 회의에서는 독신을 사제들에게 강요하면 평생 독신을 감당할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을 것이므로 위험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성애(sexjality)에 대한 공포에 바탕을 둔 여러 이유들도 있고, 또한 경제적 이유들도 있어서 독신제를 의무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가족을 둔 사제들은 교회재산을 자기 자녀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리고 사제(개인의)재산과 교회 재산을 구분하기는 어려워지고,교회 물자를 탕진할 위험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교회의(사제 가정으로부터의)독립을 보전하기 위해,그레고리오 교황의 개혁으로 독신제를 성직자들에게 의무로 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고,농촌 지역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제가 가족을 뒀다.  그런 일이 보고되면,(그 사제는 책임진 교구의)주교들은, 이 당시 주교들 상당수는 자기 교구를 돌아보는 일이 드물었는데, 때때로는 돈을 받고 눈을 감아 주는 것으로 끝내곤 했다.  독일에서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루터가 맨처음에 이런 류의 부패에 강력히 항의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원칙을 의무로 하는 데 "절대 불관용"을 제대로 실시한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 뒤 가톨릭의 자체 개혁인)트리엔트공의회부터로,이로부터 주교들은 자기 교구를 더 자주 순시하게끔 됐다.   그 이후로,하지만 성직자 지위는(그 본성이 아니라) 다른(혼인한)자들과의 차이가 무엇이냐로 규정되게 되었다. 이것이 가톨릭 사회가 성직주의화되는 문을 연 열쇠였다. 마치 독신을 지키는 대가로 성직자가 평신도들에게 권위를 얻은 것 같았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모델은 내파하게 됐는가?  사회의 세속화가 성직자계급의 사회적 권위를 흔들었다. 교회가 (사회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화되면서,성직자들은 (그럼에도 계속해서)교회에 가는 사람들에게만 권위를 휘두르게 되었는데,19세기에 이런 이들은 주로 여자들이었다. (편집자 주 - 프랑스대혁명 뒤로 19세기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국가권력의 일부로 갖던 특권들과 사회적 권위를 잃으면서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떠났는데,주로 남자들이었다.)  이렇듯 세속화는 교회의 여성화(feminization)를 동반했다. 사실,(남성보다는)이러한 (성직주의적)권위를 여성에게 강요하기가 더 쉬웠다. 여성들은 덜 교육받았고, 이미 각자의 가정에서 남성의 권위 아래 사는 데 더욱 익숙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우리는 사제들을(그들의 성직자주의 관점을)돕거나 사제에 관하여(자신들이)열등한 지위를 받아들이는 여성들을 본다. 하지만 젊은 여성들은 더 이상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대개는 나이든 여성들이 그런다.  마르셀 고세는 가부장제가 쇠락하면서 교회도 쇠락할 것으로 보는데,그의 관점에서는 교회는 가부장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학대 사건들에서 성직자계급의 약점이 잘 드러난다.(성직주의적)권위를 행사하고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는 취약한 사람들뿐인데,우선 여성과 아이들이 포함된다.
  (문)교회는 성직자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하지만 모든 문제들이 평신도들, 특히 여성들과 더불어 토론될 때에만 그럴 수 있다. 성학대 문제도 포함해서.  교회는 지금까지 신학적 차원을 제외하고는 성혁명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기를 원한적이 없다. 역사적,또는 존재적 차원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창한)몸의 신학(theology of the body)이 인간 현실,특히 여성의 성애를 무시하는 면이 너무 많다는 것이 유감이다.

기사 원문: http://international.la-croix.com/news/women-will-enable-the-church-to-overcome-clericalism/8317



사진.글 ⓒ김용철

내가 살고 있는 본죽리의 겨울 풍경은 알프스만큼이나 아름답다.눈 오는 날 아침 산책에서 만나는 세상은 새하얀 겨울왕국이다.몸과 마음에 스며드는 따뜻한 생각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나에게 집중한 나머지 이웃을 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여기 강론대]

 

"전통"의 존재 이유는

마태 5,13-16

 

 

  강이나 바닷가에 아이가 있으면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누군가는 감시를 해야 하고 위험지대를 알리는 노란 띠를 둘러야하며,필요한 규칙을 지키도록 주의를 주어야 한다. 이것은 '생명'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토를 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수영하는 법을 익히고 위험을 다루는 여러 훈련을 받게 된다면,그리고 청년이 되어 먼바다로 나아갈 만큼 성장했다면 어린 시절에 적용했던 규정과 세세한 수칙은 버려야 한다. 아이적 필요했던 규정을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 적용한다면,그래서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고 가두는 도구가 된다면 더는 규정이 아니라 학대이고 폭력이다.

  모든 전통은 태어난 맥락과 시점이 있다. 신명기 역시 그것을 밝히고 회상시킨다. 애초에 하느님 규정과 법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와서 물 없는 광야,펄펄 끓는 대지와 밤의 추위,독사나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어린아이들과 식솔들을 지켜내야 했다. 죽음의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는 누구든 예외 없이 준수하고 지켜야 할 규정들이 있다. 그들은 살아 돌아와서 이 긴여정을 회고하였다. 하느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어루고 달래며 보살펴 주었는지,자신들이 겪고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의 법규와 규정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해방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지혜와 슬기'(신명 4,6)의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자손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장치'같은 것이었다. (신명4,1,6)'전통'이란 그런 것이다. 전통은 기억되고 퍼올려져야 할 '샘'이다. 만일 우리에게 기억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더 이상의 진보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의 모방에만 묶여 있다면 박제된 화석을 껴안고 사는 꼴로 전락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곤혹스런 일과 맞닥뜨린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들이 예수에게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이 뻔하고 상투적 질문에 예수는 간결하고 정확한 어조로 중심을 건드린다. "너희는 '사람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으로 둔갑시켜 유통시키는구나. 만들어진 전통,우상을 참된 진리(교리)인 양 가르치며 헛된 신을 숭배케 하는구나!"(7,6-8)

  '조상들의 전통'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정결레법이든 안식일법이든 이들이 일상에 쳐놓은 세세한 그물에 걸리지 않고 넘어갈 장사가 없다. 이는 '손을 씻고 안 씻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전통'은 이유를 막론하고 습득된 것이어서 보통의 사람들이 '아니오'라고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전통이 신적 영역과 관련된 제의나 전례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장벽은 무한대로 높아진다. 무기력한 대중은 신의 영역을 관장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제사장과 율법학자 같은 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조상의 전통'을 팔아서 무한 권력을 획득했으며,하늘나라조차 가로막았다.(궁금하신 분들은 예수의 신랄한 비판을 다룬 '마태 23,1-36'의 본문을 읽어 보시길 권한다.)

  그렇다고 예수가 하느님의 규정과 전통을 폄훼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는 '율법 한 획도 없애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공언한다. 실제로 예수가 걱정한 것은 전통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은 자들의 '거짓과 위선'이었다.(마르 7,6-15)그들은 무엇보다 전통이 기억하는 생생한 체험과 정신적 가치를 사물화시킨 자들이다. 정신적 가치의 사물화는 인간을 사물적 대상으로 만들고 공동체의 가치를 왜곡시키며,그 전통을 수중에 넣은 자들을 신격화시킨다. 사실'신의 대리자'가 된다는 이 오랜 전통적 언어는 이미 위험해진 지 오래다. '신의 대리자'는 신의 권력과 모호한 경계를 유지하면서 절대적 권좌를 넘나든다. 그러니 이들의 명령은 신의 명령이고, 이들에 대한 복종은 신에 대한 복종이며,해방적 가치는 노예적 가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노예적 사회에서 폭력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더러운 존재'(7,5)는 더 이상 경건한 집회와 모임에 얼씬할 수 없으며,평생 수모와 비참을 견뎌야 한다. 이들이 겪었을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오늘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그러니 이들의 고통에 눈곱만큼의 연민이나 자비도 없던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의 크기가 어떠했을지 가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마태23,1-36)

  오늘도 전통은 뜨거운 감자다. 어떤 자들은 전통을 뛰어넘으려 하고 어떤 자들은 전통을 지키는데 사력을 다한다. 새로운 개혁을 단행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 것이 '오랜 전통'이고 보면,전통이 과연 현재 우리 삶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지,애초의 뜨거웠던 기억이 내 삶으로 전달되고는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예수는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응수하였다. '여인아,(조상들의 전통인)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들릴 때가 온다...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4,21-23)

  이제 '아이를 위해서'쳐 두었던,시효가 다 된 노란 띠와 감시와 규정은 거둬 내야 한다. 전통은 아이가 더 먼 바다를 항해 나갈 수 있도록 '밀어내는 힘'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전통은 소멸하면서 존재하는 것이지 자신을 지켜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루카5,4)게 하는 것,새로운 비전과 전망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그것이 전통이 할 일이다.

 

강신숙 수녀/성가소비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