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 시집 '천년의 바람‘ 중에서 -
1977년 태양계 행성 탐사를 목적으로 발사된 무인우주선 보이저1호가 중요한 임무 수행을 다한 13년 뒤 태양의 가장 바깥쪽 행성의 궤도를 넘어선 공간을 초속 18km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중 지구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보이저는 이미 배터리가 다 닳고 관성으로만 진행하고 있었다. 광속으로 보낸 신호 명령은 '카메라를 지구로 돌려 사진을 찍어 전송하라'는 것이었고, 이 신호는 5시간 후에 60억km 떨어져 있는 보이저에 도달했다.
몇 달 후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실현가능성을 기대치 않았던 이 명령에 따라 보이저는 90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태양계의 가족별과 우주공간에 외롭게 빛나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 등을 찍은 수 십장의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당초의 임무를 마치고 아무런 에너지도 없이 관성으로 나아가는 보이저의 충실한 명령수행은 많은 과학자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보이저가 보낸 이 한 장의 사진에 영감을 받아 칼 세이건은 자신이 쓴 Pale Blue Dot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주공간에 외로이 떠있는 한 점을 보라. 우리는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성자와 죄인 등 모든 인류가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티끌과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우주에는 1000억 개의 은하가 있단다. 은하간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은하만 하더라도 200만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단다. 그 시간과 공간의 상상만으로도 아득하다 못해 아찔하다. 또 생각하면 이승에서의 삶 전부가 아주 짧은 꿈은 아닐까? 그렇게 쪼개어 생각하니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가 다시 아득해진다. 그러니 그 우주의 한 귀퉁이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어른거리는 냉수사발을 그냥 마실 밖에는...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시간 / 김은숙 (0) | 2018.05.12 |
---|---|
슬퍼할 권리 / 노혜경 (0) | 2018.05.12 |
좀팽이처럼 / 김광규 (0) | 2018.05.12 |
세상이 달라졌다 / 정희성 (0) | 2018.05.12 |
밥 / 정진규 (0) | 2018.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