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 정진규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숫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같다
다 내어주시고 그분들의 쌀독은 늘 비어 있었을 터이니까 늘 시장하셨을 터이니까
밥을 드신지가 한참 되었을 터이니까
- 한국시인협회가 펴낸 ‘사화집(1986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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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시계의 동력을 공급해 주는 일, 태엽을 감아주는 일이 밥을 준다는 말과 동의어임을 우습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어릴 때의 기억이 있다. 그 후 별 의심 없이 그 말은 우리의 보편적 감성에 편입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어 왔는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어 요즘엔 밥줄 시계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농담인지 근거가 있는 얘긴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말에 중요한 사물일수록 한 음절로 되어있다는 것, 밥 떡 술 물 피 돈 똥 해 달 별 눈 코 귀 입 손 발 꽃 새 밤 낮 잠 길 비 눈 빛 말 불....그런데 이러한 것들 중 으뜸 중요한 것이 아마도 밥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지하 시인 말마따나 인류활동의 모든 것은 '제사'와 '식사'인데, 제사가 식사이며 식사가 바로 제사로서 이는 '밥'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활동이라 할 수 있겠다.
정진규 시인의 이 시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고, 특히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 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대목에서 21세기의 인류문화사적 중요 과제 가운데 하나인 종교와 종교 간의 화해가 염원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 대동화해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인류 평화의 9할은 족히 획득할 수 있으리라.
남북통일도 그렇다. 김일성이 패기 넘칠 때 '인민들에게 이팝같은 쌀밥에 소고기국을 날마다 먹일 수 있도록 하는 게 최대의 소원이며 과제'라고 자주 말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북한 현실은 그것과 너무 먼 거리인 반면에 남쪽에는 쇠고기의 품질 문제로 밥상 뿐 아니라 온 나라가 시뻘겋게 달구었던 한 때를 기억하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저 북쪽의 동포가 쇠고기는 고사하고 밥 한 공기 거르지 않고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날, 자연스런 겸상의 그날이 어서 와야 통일도, 그 통일도 당겨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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