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 시집 『좀팽이처럼』(문학과지성사, 1988)
* 김광규 :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 졸업. 독일 뮌헨에서 수학.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으로 녹원문학상, 1983년 두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김수영문학상, 1990년 다섯번째 시집 『아니리』로 편운문학상, 2003년 여덟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로 대산문학상, 2007년 아홉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으로 이산문학상, 2011년 열번째 시집 『하루 또 하루』로 시와시학 작품상을 수상. 그 밖에 시집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오른손이 아픈 날』,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학술 연구서 『권터 아이히 연구』 등. 그리고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 『로렐라이』 등 번역. 2016년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독문학).
이 시는 80년대 후반 작품으로 일단 현재의 달라진 통계 수치를 말하자면, 지금의 세계 인구는 50억이 아니라 74억이다. 그리고 서울은 특별시에 한정한다면 출산율 저조와 맞물려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나는 가구가 꾸준히 늘어난 탓에 1,000만이 무너진 상황이다. 토지공개념을 환기시키면서 80년대 중반 우리의 경제 현실을 그린 이 시는 한창 군부독재가 판을 칠 무렵 전아무개가 이 천억을 신나게 해먹을 당시의 이야기다. 한국의 부자들이 부동산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각별해지기 시작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신촌 땅 부자의 위세도 대단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땅이라면 대한민국에서는 신촌 보다는 강남이다. 그 잘나가는 강남의 땅값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부자 동네인 이곳은 한번 입성하면 절대 나가려하지 않고 밖에서는 새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돈 보따리를 꽉 틀어쥔 채 대기하는 곳이 이 동네다. 돈으로 도색한 그들만의 별종 문화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곳. 우리는 그곳을 서울시 '강남 특별구'라고 칭한다.
되짚어 보면 해거름으로 불어 닥친 부동산 이상 열기의 중심지역. 버블이라 규정짓고서도 그 열병은 좀처럼 식지 않아 돈 놓고 돈 먹기와 강남불패의 '아파트 따먹기'전쟁이 끊임없이 진행되던 곳. 그들의 집값을 지키기 위해 사교육 시장을 유지하고, 입맛에 맞는 구청장 의원 교육감 시장 대통령을 뽑으려 했고, 아파트 값 떨어질까 우려해 오래전엔 관할에 있던 공고를 기어이 폐교시켜버리고, 상고 출신 대통령과 여상 출신 영부인을 도저히 아니꼬워서 못 봐주겠다며 내내 뒤흔들어댔던 진원.
그들이 뻐기면서 돌아다니는 그 땅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으나 그들은 토지의 가치를 공유하길 꺼려하며 배타적 사용권과 처분권만을 누리고자 한다. 이로 인해 개인, 계층 간 부와 소득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분배의 왜곡을 수정하고자 하는 모든 정책 제안은 불순한 좌익의, 종북의, 적의 수작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긴 그랬던 그들도 지난 정부의 무능과 깽판에는 혀를 내둘렀다.
그 쪽팔림으로 그들 가운데 절반은 이 정부의 탄생을 도왔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 다시 감춰둔 재테크의 촉이 가동되었다. 물론 이제는 강남만의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식겁했던 추억이 있는지라 문재인 정부로서도 부동산 투기와의 전면전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TV에 출연한 부동산 전문가라는 작자들 열의 아홉은 일단 그냥 버티라고 조언한다. 어쩌랴, 그들 꼴리는 대로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지금도 우리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을.
권순진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퍼할 권리 / 노혜경 (0) | 2018.05.12 |
---|---|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0) | 2018.05.12 |
세상이 달라졌다 / 정희성 (0) | 2018.05.12 |
밥 / 정진규 (0) | 2018.04.13 |
카프카의 집/ 황학주 (0) | 2018.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