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깃들 때문에
-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 2016)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이라면 얼른 자식이나 손자 따위의 피붙이를 떠올리겠지만 어디 이들뿐이랴. 감수성에 널푼수만 있다면 우리 둘레에는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오르는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하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은 얼마든지 늘어나리라. 싱그러운 자연과 그 생명 현상은 물론 그림 한 점, 노래 한 곡, 시 한 편에서도 그 감정은 고스란해질 수 있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그들이 반짝이는 눈물방울로 고이기도 하는 것을. 또 때로는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기도 한다는 것을.
여기서 나도 잘 몰랐던 ‘발맘발맘’을 찾아보았다. ‘한 발이나 한 걸음씩 길이나 거리를 재어 나가는 모양을 나타내는 우리말’이라고 한다. 즉, 발길 가는 대로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을 뜻한다. 마치 시인 자신의 시에 대한 태도를 함의하는 듯하다. 이정록 시인은 그동안 "자연과 인간이 융화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며, 인간과 인간이 화해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경"을 빼어난 응시 감각으로 포착하여 보여주었다. 언젠가 시인은 감동과 아름다움, 의미와 재미 등의 시적 전략 가운데 자신은 재미에 주력한다고 했지만, 최근 그의 시들을 보면 이 모든 것이 풍부하게 넘실대며 아우러져 스며들고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뛰어난 묘사와 비유, 해학과 능청으로 언어를 부리는 솜씨는 일찌감치 정평이 나있지만 웅숭깊은 사유와 섬세한 관찰 또한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그리고 일상의 그늘진 소재를 다루면서도 언제나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긍정의 시선, 사소한 존재들에 대해서도 사랑의 촉수가 가동되는 탁월한 생태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독자는 시인이 펼쳐놓은 조화로운 풍경 속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가치와 본질을 성찰하고 깊은 울림을 동반한 은은한 감동을 선사받는다. 특히 몇 년 전 작품이지만 모성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원천으로 삼은 <의자>라든가 자연과의 공생과 교감의 장을 묘사한 “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등의 표현은 인간의 관점과 자연 현상을 결합한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을 대변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다. 언젠가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거주하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젊은 여성이 “잠깐만요!”하고 급하게 타더니만 아주 짧은 순간 시인을 힐끔 쳐다보고서는 이내 엘리베이터에서 황급히 다시 내리더라는 것이다. 찰진 근육으로 뭉친 덩치도 있고 겉으로 얼핏 보면 좀 우락부락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정록은 참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시인이다. 아이들을 몹시 사랑하여 동시를 쓰고, ‘엄니’로부터 물려받은 입담으로 주위에 즐거움을 주고, 감동 없는 시들이 창궐한다는 이즈음 공감능력 뛰어난 그의 시들은 온몸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향해 육박한다.
신경림 시인도 “이 시집 속의 시들이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슬프고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시들”이라고 평했다. 그 시집이 제5회 ‘박재삼문학상’에 선정됐다. 오늘 그 시상식이 있었다. 심사를 맡았던 이하석 김명인 시인은 “이 시집은 시인의 표현대로‘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들’의 환한 표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순간의 방심 위에 얹히는 영롱한 시의 모습이기도 했다.”라고 평가했다. 이정록 시인은 “박재삼 선생님이 꿰다가 남긴 수정눈물은 지극정성으로 제가 다시 잇대겠습니다.”라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그의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매력적인 시들이 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삼천포로 가서 직접 축하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여기에 그 마음을 얹어둔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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