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피우다 / 정끝별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기공을 한다 했다
몸을 여는 일이라 했다
몸에 힘을 빼면
몸에 살이 풀리고
막힘과 맺힘 뚫어내고 비워내
바람이 들고 나는 몸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의 몸이 가장 열려 있다고 했다
닿지 않는 곳에서 닿지 않는 곳으로
몸속 꽃눈을 끌어 올리고
다물지 못한 구멍에서 다문 구멍으로
몸속 잎눈을 끌어 올리고
가락을 타며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다면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람을 부리고
바람을 내보냄으로써
저기 다른 몸 위에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일 아닌가!
- 시집『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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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놀다 들어온 손자의 언 손에 할머니가 호호 입김을 불어넣는다. 이때의 입김에는 더운 기운뿐 아니라 할머니의 차원 높은 뜨거운 사랑의 氣가 듬뿍 함유되었다. 이런 氣의 원활한 생성과 소통을 위해 功을 들이는 게 기공이 아닐까. 이 시는 기공의 요체인 몸 안의 탁한 공기를 토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잘 설명하고 있다. 결국 몸을 헐겁게 만드는 것인데, 느닷없이 그 ‘바람이 들고 나는 몸’의 대가들이 바로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라는 주장을 인용하며 동조하고 있다.
문정희 시인은 ‘러브호텔’이란 시에서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며 온몸이 후들거렸다고 했다. 물론 이 시와는 무관한 함의이긴 한데 어찌 생각하면 아주 상관없지는 않은 것 같다. 이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바람을 부리고 바람을 내보냄으로써’ ‘다른 몸 위에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작업 공정의 공통점이 있다니 말이다. 나의 마음과 호흡이 혼연히 하나가 되어 나이면서 내가 아닌가 하면,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또 다른 생명과의 조우이니 말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정신세계를 강하게 엮었던 ‘기공’도 ‘우주의 기운’이 아니던가. 그는 지난 2015년 4월 중남미 순방 때 브라질 행사에서 “브라질의 문호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라는 소설에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말을 써먹었다. 한 달 뒤 어린이날에도 ‘대통령이 꿈’이라는 한 아이에게 다시 이 말을 했다. 그 ‘우주의 기운’이 자신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있다고 믿었다. 그동안의 드러난 행실로 미뤄보면, 나라와 백성 그리고 자기는 한 몸의 운명이라는 착각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아버지 박정희도 자신도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우주의 기운을 받은 절대 권력으로 나라를 통치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게다. 지금도 잠시 시험에 들었을 뿐, 우주의 기운이 반드시 자신을 일으켜 세우리란 신념을 가진 것 같다. 그런 박근혜가 5년 전에는 절반의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원칙을 중시하는 깨끗한 한국의 여인상’으로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후보 가운데는 ‘우주의 기운’에 기대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 분이 있다. ‘정체성이 불분명한 UFO’같다는 오래전의 평가가 불식되지 않고 있다.
미심쩍은 믿음으로 인해 더 이상 불행한 대통령이 탄생되어서도, 그 때문에 국민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엮이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되겠다. 지금은 누구의 시대도 아닌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주인인 시대이다.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으려는 통치자의 발상만큼 위험한 건 없다. 어느 특정인이 간구하는 소름 돋는 우주의 기운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 천지자연의 조화로운 기운을 긍정한다.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듯 이완과 고요의 시간 속에 정신의 풍요를 바라는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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