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 더욱
-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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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결혼하기 이태 전에 이 시를 읽었다. 그러니까 6년 전 겨울이다. 서울 사는 가난한 신혼부부의 사랑을 그린 이 시를 읽으며 서울 사는 온달 같은 큰 아이가 생각났다. 평강공주 같은 희정이를 만났는데, 그래서 장가가고 싶어 죽겠다는데, '아나 여기 있다' 서울의 비탈길 작은 연립 전세자금이라도 한 1억 턱 내놓지 못하는 아비는 은박지 씹는 기분으로 한때 유행했던 '되고송' 하나 패러디하여 마빡에다 탁 붙여주었다. 결국 함께 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자가 되겠다던 그들은 ‘경제’ 문제로 티격태격하더니만 파탄이 나고 결혼은 교회에서 만난 다른 여자와 했다.
쌀독에 쌀 떨어지면 라면 끓이면 되고, 라면값 오르면 손가락 빨면 되고, 빨다가 심심하면 동네 한 바퀴 돌면 되고, 병원비 비싸면 안 아프면 되고, 가끔 전기 나가면 부둥켜안으면 되고, 첫날밤처럼 하던 대로 하면 되고, 코피 터지면 틀어막으면 되고, 사랑도 지쳐 가면 물 베기 싸움 한판 하면 되고, 위로가 필요하면 같이 기도하면 되고,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그리고 이 시처럼 세속적 욕망을 다 버린 사람만이 마주할 수 있는 정갈한 영혼으로 빚어진 사랑인지 먼저 물었다. 현실의 초월이 들여다뵈지만 그 건너뜀의 폭만큼 진지하며, 상상력의 공간 또한 몽골의 푸른 초장처럼 넓은지 알고 싶었다. 한 남자에 대한 순결하고 따뜻한 사랑이 한 땀 한 땀 해진 서로의 허물을 꿰면서 구현되는, 그래서 시에서 보여준 사랑처럼 강하고 단단한지 궁금했다. 아들아, 사랑이 퇴색된 황량한 시대에 넓고 깊은 사랑의 세계로 그윽하게 우리를 인도하는 저 손 봐 두어라. 그리고 우야든동 서울의 달 아래서 살아라 조언했건만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만나 지혜를 낳고 어찌어찌 허름한 아파트 하나는 장만했다지만
지금은 아주 멀리 있는 바보 온달과 이미 40대에 들어선 며느리 평강공주는 여전히 ‘애틋한 사랑’을 지속하고 있는지,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며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할 자신이 있는지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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