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김수열
일찍이 어느 시인이 말했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일본 군부가 오끼나와를 조선의 성노예를 반성하지 않고
우리 군부가 제주4·3을 강정마을을 반성하지 않고
반성을 모르는 일본은 그래서 절망이다
반성을 모르는 우리는 그래서 절망이다
절망은 더 큰 절망을 낳고
절망이 낳은 더 큰 절망은 거짓을 낳고
거짓은 큰 거짓을 낳고
거짓이 낳은 더 큰 거짓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고
폭력이 낳은 더 큰 폭력은 광기를 낳고
광기는 마침내 아무렇지도 않은 학살을 낳고
그런 학살이 낳은 더 큰 학살은 마침내 집단학살을 낳고
오끼나와가 그랬고 제주4·3이 그랬지
중국 난징이 그랬고
베트남 중부 선미가 그랬고 빈호아가 그랬지
하지만 우리는 알지
제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은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는 것을
그리하여 학살에 대한 성찰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대한 성찰은 아름다운 평화를 낳고
평화가 낳은 더 큰 평화는 화해를 낳고
화해가 낳은 더 큰 화해는 참된 진실을 낳고
진실이 낳은 더 큰 진실만이 사랑과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먼 훗날 어느 시인은 말하겠지
희망은 사랑은 죽는 날까지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보는 거라고
- 계간 《제주작가》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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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한 ‘어느 시인’은 김수영이다. 그는 「절망」이라는 시에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성을 모르는 우리는 그래서 절망이다’ 제주 4.3에 대한 첫 국가 차원의 사과는 55년만인 2003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서였다. 국가권력의 만행이었음을 반성하고 2006년 위령제에 참석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4.3을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사건으로 보는 보수 세력과 인식을 같이한 나머지 한 번도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근혜도 마찬가지였다. ‘좌익소요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많이 희생됐다’는 발언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그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고 가슴 아픈 역사라면서 극복해야할 과제라고만 했지 진정한 반성은 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4.3 항쟁에 대한 재조명 전까지는 ‘폭동’으로 규정하였고 교과서에서도 그리 가르쳤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제주4·3을 빨갱이들의 반란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반성을 모르는 우리는 그래서 절망이다’
사과의 정도와 시기는 강하면 강할수록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모범적인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며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는 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호치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식에 보낸 영상축전에서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간접적인 사과의 뜻을 표한 것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그들 입장에서도 미흡하지 않았을까.
이 역시 과정을 겪은 뒤의 반성 수준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의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불행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베트남 종전 이후 최초의 관련 발언을 내놨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베트남을 방문해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무런 이에 대한 발언이 없었다. 베트남이 전승국인 점을 감안하면 수위 조절의 고심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유감’도 사실상 사과의 표현이다. 하지만 ‘더 큰 평화’와 ‘더 큰 화해’를 위해서도 명확하고 화끈한 사과가 필요했다.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당시 참전용사들을 욕되게 하는 처사라지만 일본이 그렇듯이 진실을 호도하는 국가주의는 옳지 않다.
지난 22일 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공식방문을 앞두고, 강우일 주교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죄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이자 ‘한베평화재단’ 이사장인 강우일 주교는 “고통스럽지만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며 “베트남 도처에 놓인 한국군 학살의 증거들 앞에서 저와 함께한 한국의 시민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는 베트남 정부의 기조 이면에는 역사문제에 대한 베트남 국민의 큰 관심이 자리하고 있었고, 또한 한국 정부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목불견첩(目不見睫)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눈은 자기 속눈썹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남의 허물은 잘 보고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예수도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고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탓하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일본을 상대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왔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십년이 넘도록 수요 집회가 열리고 전국 곳곳, 심지어 미국이나 동남아 등지에도 의자에 앉아있는 소녀상이 세워져있다. 베트남 ‘빈호아’에 가면 ‘한국군 증오비’가 서있다. 과연 우리는 일본을 보는 눈으로 베트남을 보고 있을까. ‘진실이 낳은 더 큰 진실만이 사랑과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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