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재촉하다 / 이규리

모든 2 2018. 4. 13. 22:32




재촉하다 / 이규리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도 있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서랍 속에 접어 둔 언니의 봉긋한 브래지어는 내가 꿈꾼 조숙하고 달콤한 흥분이었다. 겨우 밤톨만한 젖멍울이 생겼을 뿐인 내 가슴을 단숨에 수식했던 브래지어의 황홀을, 밤마다 나는 재촉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저 브래지어의 우듬지에 닿기를, 분홍빛 유두가 살며시 끝을 향해 긴장해 있기를, 그러나 재촉했던 지식, 재촉했던 사랑처럼 내 가슴은 그리 빨리 부풀지 않았고 언니의 에로틱한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큼 나는 일찍부터 공허 같은 걸 품고 다닌 게 아닐까.

 

 어디를 휘돌아 나왔는지 언덕과 낭떠러지를 가졌던 내 안의 길에서 밀어 올렸던 꽃대,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렸다. 아직도 재촉할 희망이 있는가.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 더욱 비어 있고 이제 우듬지에 닿았던 유두가 조금씩 빈틈을 가지지만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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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제 팔공산 입구에서 이규리 시인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몇몇 여성동무들과 함께였다. 자연을 가득 끌어들인 갤러리호텔 같은 이 시인의 집도 방문했다. 경북대 건축학과 교수인 부군이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다. 크다란 창을 통해 팔공산의 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행들은 부러움의 눈빛으로 반짝였다. 이규리 시인은 과거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던 이웃이기도 했다. 언제 보아도 세속에 때 묻지 않은, 때를 타고 싶지 않은 볼 빨간 사춘기의 단정한 여학생 같은 느김을 주는 시인이다. 

 

  우리나라 여자 청소년의 사춘기 시작은 평균 11세로, 끝날 때까지 약 4년이 걸린다고 한다. 사춘기 현상은 대개 젖멍울이 생기면서 젖꼭지가 나오는 유방 발달로 시작한다. 사춘기의 몸과 심리 변화는 거의 성과 연관된다. 이 시기에는 신체의 성장에 따라 성적 기능이 활발해지고,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한다.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는 왕성한 호르몬 분비와 더불어 성에 대한 호기심, 억압적 분위기에 대한 반항심까지 겹쳐 그 시기의 특징을 절묘하게 상징하고 설명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생리와 함께 가슴이 커지기 시작하는데 시인은 밤마다 재촉을 거듭했지만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큼진작 사랑에 대한 헐거운 공허를 체득한다. 그것은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보편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요즘은 초경을 맞는 딸아이를 위해 아빠가 꽃다발을 안기고 가족들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공개적으로 축하무드를 조성한다지만, 예전에는 우듬지에 도달하기까지 그 모든 성장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리기도 했겠다.


  어릴 땐 얼른 성숙해지길 재촉하지만 시간은 제 페이스대로 흘러 때가 되면 누구나 어른이 된다. 지금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성장속도가 빨라져 몸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전에 비해 순조롭다. 성인이 될 무렵은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에다가 탱탱한 몸이 빛나는 시기이지만 그 젊음은 미숙하다. 밀란 쿤데라는 '젊음이 주인공일 때 역사는 끔찍했다'고 했다. 막상 성인 대우를 받을 나이가 되면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그 유예를 갈망하는 트윅스터족(twixters)’이 늘고, 요즘은 그 연령이 30대 후반까지 확장되었다.


  ‘이도저도 아닌’(betwixt and between)에서 유래된 트윅스터족은 성인으로서 당연히 독립적인 생활을 해야 함에도 직장이나 가정 없이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세대를 뜻한다. 사회 여건상 경제적 독립이 쉽지 않은 것도 이유이겠으나, 성인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아이도 어른도 아닌어정쩡한 명목상 성인의 양산은 어쩌면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에서 겪는 성장통이 부족했던 까닭은 아닐까. 한 사람의 성인이 되기 위해 이렇듯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난하다. 지금 그 과정을 다 겪은 꽃봉오리들의 개화가 눈부시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