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전조/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1757∼1827)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매는 들사슴은
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준다.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신성한 영혼에겐 안성맞춤의 옷,
모든 슬픔과 기쁨 밑으로는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아기는 강보 이상의 것,
이 모든 인간의 땅을 두루 통해서
도구는 만들어지고, 우리의 손은 태어나는 것임을
모든 농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그것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해와 달이 의심을 한다면
그들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국가의 면허를 받은 매음부와 도박꾼은
바로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짤 것이다.
가진자의 환호성과 잃은 자의 저주가
죽은 영국의 관 앞에서 춤을 춘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보지 않을 때
거짓을 믿게 된다.
눈이란 영혼이 빛살 속에 잠잘 때
밤에 태어나 밤에 사라지는 것
밤에 사는 가련한 영혼들에게
하느님은 나타나시고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러나 빛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다.
- Auguries of Innocence(순수의 전조)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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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화가이자 신비주의자인 월리엄 브레이크는 당시 그가 살았던 영국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잘못되어가는 조짐들을 통해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기득권층만을 위한 법과 제도로부터 소외당한 하급계층이 겪어야할 가난과 비통함을 신랄하게 묘사한 시를 즐겨 쓴 그의 철학적 바탕은 이성과 정의이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눈과 시대를 앞서가는 신비주의적 감각은 훗날 높이 평가받지만 난해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그는 어둠과 악몽의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단지 자연에 대한 외관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다. 대개 이론을 벗어나서 묵상 중에 상상하는 신비의 세계를 그렸다.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공포의 상징으로 표현된 ‘사탄의 맷돌’은 구닥다리 비주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속성을 비판하는 기재로 다시 인용된다. '돈 놓고 돈 먹는' 카지노자본주의로 치달아 근년 세계 도처에서 빵빵 터졌던 금융위기를 통해 목격하였듯이 마침내 경제를 거들내고 말 것임을 예감했다. 캐피털리즘이 시장근본주의(신자유주의)와 만나면 사탄의 맷돌이 되어 인간(노동)도 자연(토지)도 구매력(화폐)도 온통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이 책은 전망했다. 또 사회 전반에 벌어지는 혼란과 고통은 경제적 수치로 계량할 수도 없다.
사회를 오로지 경제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려는 시각은 삶을 파괴시키고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경제란 사회의 수많은 기능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천박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멸망을 재촉한다. 1944년에 나온 이 책이 재조명받는 이유는 좌우 이념에서 벗어나 치밀한 비판적 접근을 거쳐 독특한 해법을 펼쳐 보이기 때문으로 브레이크의 신비한 감각과 상통한다. 오늘의 현실은 평생을 인간의 고통과 근원에 대해 고민하고 배금주의에 맞서 ‘사회’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에서 보여주는 불길한 조짐들이 지금 이 땅 곳곳에서 터지고 있어 '거대한 전환'을 예고하는 듯하다.
삼성증권의 황당한 배당실수와 유령주식 공매도 사건을 보면서 단지 ‘모럴해저드’ 정도로 치부하고 넘길 일인지 강한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공매도 폐지 여론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금감원은 이번 사태를 엄밀하게는 공매도와 무관하다는 이상한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공매도를 옹호하고 역성드는 듯한 뉘앙스를 띄고 있다. 사실 공매도는 일반투자자들과는 별 상관없이 기관투자자들이 주식의 하락시기에도 돈을 벌 수 있도록 제도화해준 시스템이다. 여론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금융적폐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자본시장질서를 뿌리째 뒤흔든 중대한 사태일 뿐 아니라 ‘천국을 온통 분노케’할 어둠의 모습이다.
금감원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제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입장을 아울러 밝혔다. 김기식 원장의 부적절한 출장 논란이 꽤 길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은행, 증권, 보험감독원 등이 통폐합되기 전에는 은행감독원이 한국은행 산하에 있었다. 엘리트 한은맨은 감독원에 발령 나는 것을 꺼려했지만 당시 감독원만큼 실속 있고 끗발 있는 부서도 드물었다. 검사를 위한 잦은 출장에도 출장비는 거의 쓸 일이 없었으며 피감 은행으로부터 대우도 극진했다. 감독원 근무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재직했던 70년대 말 80년대 초에는 골프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아 검사역들이 출장 갈 땐 테니스 라켓이나 낚시가방을 주로 챙겨갔다. 김기식 원장의 거취가 어찌 결판날지 모르겠으나 금감원은 이참에 쌓이고 쌓여 관행이 된 무수한 금융적폐를 말끔히 처리해주길 바란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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