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참회/정호승

모든 2 2018. 4. 13. 22:27



참회/정호승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 한그루 심은 적 없으니

죽어 새가 되어도

나뭇가지에 앉아 쉴 수 없으리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에 물 한번 준 적 없으니

죽어 흙이 되어도

나무뿌리에 가닿아 잠들지 못하리


나 어쩌면 나무 한그루 심지 않고 늙은 죄가 너무 커

죽어도 죽지 못하리

산수유 붉은 열매 하나 쪼아 먹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초승달에 한번 앉아보지 못하고

발 없는 새가 되어 이 세상 그 어디든 앉지 못하리

 


- 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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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말씀 가운데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공의의 법칙>이 퍼뜩 생각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만고의 진리를 담은 속담도 있다. 자연의 법칙이고 생명의 법칙이다. 내가 이 세상에 뿌린 씨는 무엇이고 심은 나무는 무엇일까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세상에서 뿌린 것을 다음 세상에서 거두고 누린다면, 내 다음 생도 뻔할 뻔자다. 황지우 시인은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에서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라고 했지만 다음 생을 얻는다 하더라도 잘 살아낼 자신은 없다. 다짐이야 못할 바 없지만 왠지 예감이 그렇다. 

 


 포괄적 의미 말고 한정적으로 나무와의 관계만 떼놓고 생각해봐도 사정이 별로 나을 게 없다. 어린 시절 학교의 단체 식목 행사에서 겨우 뽕나무나 니키다소나무 묘목 몇 그루 심으면서 구덩이에 물을 주고 땅을 콩콩 밟아댄 기억은 있다. 산에 가서 나무젖가락으로 송충이 몇 마리 잡은 추억 정도는 남아있다. 하지만 그뿐, 나무에 핀 꽃들을 올려다볼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더 굵어져서 아버지를 도와 앞마당에 살구나무와 무화과나무 따위를 심기는 심었을 터이겠으나 마지못한 보조역할이었지 삽질을 제대로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나무의 경제학을 조금 알아갈 시기가 되었을 때는 식목일이 그저 하루 볕 좋은 봄날의 휴일이었고 나무를 심을 주변의 공간마저 사라져버린 뒤였다. 이후 무디어진 식목일이 몇 해 거듭되는 동안 ‘문명의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의 뒤에는 사막이 있다’는 말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지난 해 지인으로부터 얻은 귀한 묘목 두 그루를 화분에 옮겨 심었다. 토양이 적합하지 않았는지, 보살핌이 부족했는지, 원래 그런 것인지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지난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시들어 죽고 말았다.

 


 설 가운데 하나겠으나 원래 식목일은 신라 문무왕 17년 2월25일(양력 4월5일)에 당나라세력을 완전히 이 땅에서 몰아내고 명실공히 삼국통일을 이뤄낸 것을 기념해 나무를 심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제 식목일은 그 시기도 적절치 않거니와 공휴일도 아니고 실제로 식목보다는 국민들에게 나무와 숲의 중요성을 알리는 상징적인 기념일로 남은듯하다. 그럼에도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은 작은 애국이라는 정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세먼지 저감 대책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배출원 억제와 더불어 도심의 녹지공간을 늘리는 일이다. 그리고 청명 한식을 맞아 산소를 돌보거나 봄나들이 행락 길에 나섰다가 산불이나 내지는 말아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리는 비는 참 고맙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이 있다. 장 지오노는 번역가이지 소설가인 고 이윤기씨가 "내 인생은 장 지오노 이전과 이후로 나뉘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 프랑스 작가이다. 그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인간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의 행위가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것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은 더없이 고결하여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럼에도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인격과 마주하였다 할 수 있다." 그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죽어 새가 되어’ ‘나뭇가지에 걸린 초승달에 한번 앉아보지 못하는’ 불행한 신세만은 면해야겠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