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공광규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동물
내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파서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세 모녀가 생활고에 자살을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 하고
시를 써서 시집도 내고 문학상도 받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 시집 『파주에게』(실천문학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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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는 티베트와 히말라야 주변 6000m 고원지역, 그리고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몽골지역에서 사육되는 긴 털을 가졌고 소처럼 몸집이 큰 동물이다. 지난 3천여 년 동안 히말라야 고산의 깨끗한 소금을 지고 험준한 산을 넘어 네팔로 와서 유목민이 필요로 하는 식량으로 물물교환을 하고는 다시 되돌아 올라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히말라야 원정대의 무거운 등반장비를 지고서 살을 에는 눈보라와 크레바스를 헤치고 대원들을 무사히 캠프까지 인도하는 야크는 유목민과 산악인에겐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다. 야크는 얼음이 녹았다 다시 어는 것이 반복되던 빙하기를 견디면서 강인한 DNA가 몸속 깊숙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야크는 오히려 해발 3000m 이하로 내려가면 시름시름 앓고 생식기에도 이상이 생긴다고 한다. 뱀이 땅의 에너지가 미치지 않는 고층아파트에서 살지 못하는 이유와도 같다. 낙타는 사막에서, 야크는 고산지대에서나 살 수 있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최적화된 생명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야크 이야기와 우리 주변의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과의 의미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한참 생각했다. 다른 함의도 있을 수 있겠으나 때 묻지 않은 고원 청정지역의 야크가 신성지역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어떤 이들은 매몰찬 문명과 세파에 적응하지 못하고 종래엔 ‘죽음까지 생각’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또 모녀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14년 집주인에게 마지막 집세 70만원을 남기고 자살을 선택한 ‘송파구 3모녀’ 사건에 이어 증평에서도 비슷한 생활고 이유로 자살한 모녀의 시신이 발생 수개월 만에 발견되었다. 정부가 생계형 자살을 막기 위해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을 갖췄지만 4년 만에 또 재발한 것이다. 모두 복지 사각지대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다. ‘생계형 자살’이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말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말하지만 이내 망각하고 방관한다. 혹자는 임대아파트보증금 1억2천만 원도 남아있는데 무슨 생활고냐고 말할지 몰라도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은 비단 밥 때문만은 아니다.
잘못 들어온 주식을 웬 떡이냐며 잽싸게 팔아치운 증권사 직원들의 약삭빠름이 밥을 위한 행동이 아니듯 밥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금융투자회사를 감시 감독해야 할 금감원 직원들이 내부정보를 이용 차명으로 주식 거래하는 비일비재한 현실이, 이른바 귀족 노조가 해마다 머리에 띠를 두르는 이유가, ‘문재인 케어’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집단휴진과 총궐기대회를 열겠다고 선포한 의사들의 결기가 밥을 굶지 않으려는 자구책일까. “솔직히 의사들은 10년 전 한 달에 1300만 원 벌었는데, 지금도 한 달에 1300만 원을 버니 불만이 나오는 것”이라고 서울의 한 종합병원 교수는 전했다. 2016년 기준 국내 의사의 월평균 임금이 1304만이었다.
그들은 번개탄을 피워놓고 동반자살을 감행하면서도 집세와 공과금을 챙겨서 봉투에 넣고 남긴 글 “주인아주머니,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대목에서 과연 잠시라도 눈시울이 붉어지기는 했을까. 최후의 선택을 하면서도 정부와 이웃과 사회에 대한 원망 한 마디 없이 밀린 집세를 걱정하면서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그들은 이 매몰찬 세상에서 야크와 같은 ‘미련한’ 삶을 살다가 떠났다. 이번 증평의 모녀도 죽기 전까지 공과금이 밀리지 않아 포착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이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추궁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지 못한 책임이 있는 건 아닐까. 사회적 책임은 국가 탓만이 아니다. 매몰찬 문명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책임이다. 주변에서 소리 없이 신음하고 아파하며 죽어가는 약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얼마나 돌아보았을까. 그들에 비해 자신은 염치없이 속되게 약삭빠르게 잘 살아가며 병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묻고 겸손해보긴 했을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한 살벌하고 매정한 투쟁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병들어 있다. 신음소리를 함께 듣고 같이 아파하고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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