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사진첩/쉼보르스카

모든 2 2018. 4. 12. 01:20



사진첩/쉼보르스카

 

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네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시선집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노벨문학상 수상 폴란드 여성시인 비스바와 쉼보르스카의 시는 늘 이렇듯 경쾌한 통찰과 다정한 반어적 지혜로 가득하다. 쉼보르스카는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사랑, 증오와 갈등 사이를 특유의 감각을 동원해 유쾌하게 넘나든다. 먼저 어려운 낱말 정리부터 하자. ‘만틸라’는 머리와 어깨를 덮는 넓은 여성용 스카프를 말하며 스페인이나 멕시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이때 보스는 Boss가 아니라 살 떨리는 악마와 괴물 이미지로 유명한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 히로니무스 보스를 말한다. 그러고 보니 쉼보르스카의 시에도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선명하고 뛰어난 묘사력이 자주 엿보인다.

 

  사람들은 죽음보다 깊은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거의 없다. 영원한 사랑의 고전이라 할 ‘로미오와 줄리엣’도 각기 다른 병에 걸려 사망했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찌질한 쇼에 불과했다.사랑이 아름다울 때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그 사랑이 진행될 동안 만이다. 재미는 좀 덜할지라도.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이 만약에 있다면 그건 슬프고도 웃기는 사건이다.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은 누구인가. 무슨 이유로 다른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을까. ‘아무런 미련 없이’

 

  문득 저 '황홀한 올림머리 여인'에게서 두 여인을 환기한다. 한 사람은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와 관련해 무슨 수술을 받았느니, 올림머리를 하느라고 늦장을 부렸느니 따위의 의혹 속에 파묻힌 채 관저 칩거(워낙 익숙해서 그리 답답할 것도 없겠지만)에 들어간 박근혜 식물 대통령이다. 또 한 사람은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을 당긴 마리 앙투아네트다.잘 알려진 ‘백성들이 빵(바게트)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그녀의 말은 생감자를 코에 대고 쿵쿵 냄새를 맡는다든지,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등 박근혜의 생뚱맞음과 매우 닮았다. 굶어 죽어가고 물에 빠져 죽어가는 국민을 조롱한 어이없는 언사임에도 그들은 끝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다.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 거울로 가득한 ‘거울의 방’을 꾸며놓고 혼자서 연기를 하고 대사를 읊으며 놀았다. 매일 몇 시간씩 화장에 몰두하고 머리를 치장했다. 올림머리도 부족해 60센티가 넘는 가발을 머리에 얹었다. 박근혜 역시 그동안 혼자서 드라마를 보고 밥 먹고 미용주사를 맞아가며 잘도 놀았다. 그들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했던 걸까.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있기라도 했을까. 그들의 운명에 관한 평행이론은 말하지 않겠다. 아무튼 박근혜도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흘러’ 결국 평범한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다만 감기에 걸려 죽었다 그러면 창피할지 몰라 ‘폐렴’에 걸려 죽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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