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언덕/서정주
보지마라, 너 눈물어린 눈으로는...
소란한 홍소(哄笑)의 정오천심(正午天心)에
다붙은 내 입술의 피묻은 입맞춤과
무한 욕망의 그윽한 이 전율을...
아--- 어찌 참을것이냐!
슬픈 이는 모두 파촉(巴蜀)으로 갔어도
윙윙거리는 불벌의 떼를
꿀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
시악시야! 나는 아름답구나
내 살결은 수피(樹皮)의 검은 빛
황금 태양을 머리에 달고
몰약(沒藥) 사향(麝香)의 훈훈한 이 꽃자리
내 숫사슴의 춤추며 뛰어가자
웃음 웃는 짐승, 짐승 속으로.
-문예지 《조광》 1939년 3월호-
이 시의 무대는 제주 서귀포 앞 바다의 ‘지귀도’란 섬으로 젊은 시절 미당이 석 달간 머물면서 당시 방목된 사슴들을 배경으로 쓴 시다. 지금은 낚시꾼과 바다 다이버들만 즐겨 찾는 이 섬에서 미당은 사슴을 통해 인간의 근본 욕구인 '성욕'과 '공격욕'을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무릇 인간은 이 두 본능을 은폐시키면서 살아가지만 동물의 세계는 그렇지 않음을 묘사하였다. 생태계 전체가 동식물이 가지고 있는 성욕과 공격욕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종의 번식을 위해서는 성욕이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노천명 시인은 사슴을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고 노래했으나 사실 사슴의 관(뿔)은 고귀하고 미적인 것의 심벌이기 보다는 일부다처제로 번식해가는 수컷의 전투용 무기로 기능한다. 수많은 숫사슴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일대 격투를 통하여 승자를 뽑는데 승자 독식으로 수많은 암컷들을 몽땅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시는 그 싸움에서 승리한 숫사슴이 의기양양하게 부르는 승리의 노래라고 미당이 생전에 증언한 바 있다. 또한 이 작품은 호화찬란한 궁전에서 수천 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사치스런 쾌락을 즐겼던 솔로몬의 아가(雅歌)에서 착상되었다고 하니 남자들의 '황제망상'과 권력 욕구를 고도의 상징 기법으로 배설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읽힌다.
반 전 총장이 어울리지 않은 황제망상에 사로잡혀 찔끔찔끔 소심하게 권력 욕구를 내비치더니만 패를 까 보인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결국 불출마선언을 했다. 그동안 비단길만 걸어온 그는 입국하면 바로 카펫이 깔려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 것이다. 박근혜 탄핵 정국이 가도에 차질을 빚은 건 사실이지만, 그 말고도 반 씨가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열 가지도 넘는다. 그에게 대선 레이스는 애당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피 묻은 입술을 가져본 적도, 무한욕망의 그윽한 전율을 체험한 일도 없었다. 소신이 불투명했고(나름의 애국심은 인정하지만) 당당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그에게 환상을 가졌고 어제는 그 환상이 완전히 걷힌 날이었다.
‘사상 최악의 총장’이란 평가를 받은 가운데 선거법과 UN 결의안 해석에 대한 문제를 지닌 채 가족 비리까지 얽혀 있는 반 전 총장이 무슨 마음으로 10년 만에 찾은 고국에서 대선에 나서겠다고 했는지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부추김에 잠시 노욕이 발동했던 게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개헌 추진 협의체’를 구성해 대선 전 개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고 공식 제안한 상태에서 느닷없는 포기 선언은 다른 구체적인 사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기왕에 불출마 선언을 하는 마당에서도 푸념만 널어놓은 그의 처신은 매우 부적절했고 인간적인 평가에서도 회복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이 있다. 우리는 승자에게 겸손과 당당함을 동시에 요구하듯 패자에게도 의젓하고 당당하기를 바란다. ‘내 숫사슴의 춤추며 뛰어가자’ ‘웃음 웃는 짐승, 짐승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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