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소요유(逍遙遊)/신경림

모든 2 2018. 4. 12. 01:16



소요유(逍遙遊)/신경림

 

파상 옆에는 국숫집이 있고 통닭집이 있고

옷가게를 지나면 약방이 나오고 청과물상이 나온다.

내가 십 년을 넘게 오간 장골목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다, 매일처럼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나니.

십 년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야 보고

한 달 전에 안 보이던 것이 오늘에사 보인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달려가서, 더러는

옛날 떠돌던 시골 소읍과 장거리를 서성이기도 한다.

밝은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흐려진 눈으로 새롭게 찾아내고

젊어서 듣고 만지지 못했던 것들을

어두워진 귀와 둔하고 탁해진 손으로

듣고 만지고, 다시 보는 즐거움에 빠져서.

 

밝은 눈과 젊은 귀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흐린 눈과 늙은 귀에 비로소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섭섭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끝내는 날이 될지라도.

 

/계간 《실천문학》 2010년 가을호

  



  시를 읽으면서 고은의 '그 꽃'이 함께 떠올랐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늘 오가는 같은 길일지라도 ‘매일처럼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나’고, ‘십 년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야 보’고, ‘한 달 전에 안 보이던 것이 오늘에사 보인다.’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꽃을 내려갈 때 보았다면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앞만 보며 매진하는 삶에서는 오로지 목적만이 중시되고 둘레와 과정은 경시되어 그들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놓쳐버린 아름다움이나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르게는 한창 잘 나갈 땐 하찮게 여기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빈손 내리막길에서야 비로소 귀하게 생각된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그 의미를 확장시키면 가령 출세를 하고 돈을 버는 것만이 장땡인줄 알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위치에 있을 때 어떻게 베풀고 돈을 번 뒤 그 돈을 얼마나 뜻있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해석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올라가는 길에서도 주위를 둘러보고 뒤도 돌아볼 일이다. 꽃이야 올라갈 때 보지 못했어도 내려오면서 보게 되면 다행이겠으나, 사람은 올라갈 때 보지 못하면 떠나고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멀어지고 소중한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밝은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흐려진 눈으로 새롭게 찾아내고’ ‘젊어서 듣고 만지지 못했던 것들을 어두워진 귀와 둔하고 탁해진 손으로 듣고 만지고, 다시 보는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는 것도 시력이 흐려지고 감각이 둔탁해진 대신에 마음의 푼수가 넓어진 까닭이다. 하찮은 것에도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고 그로부터 사는 재미가 우러난다는 걸 깨닫는다. 건성건성 오간 ‘장골목’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 여유와 널푼수로 인해 다시 ‘볼거리’가 나타난 것이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걸으니 그때서야 보인다.

 

  세상 모든 일이 다 때가 있고 놓친 시간과 사람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예전엔 미처 몰랐다. 계절의 신호등이 후딱후딱 바뀌어도 걸음과 마음이 분답했던 예전엔 지금처럼 이렇게 늙어있을 줄 미처 몰랐었다. 젊을 때는 젊은 대로 나이 들면 나이든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지만, 나이 드니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늘어간다. 젊음이 늙음보다 낫다는 생각을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도 확고하고 뻔뻔하게 유통시키고 있는데 과연 옳기만 할까.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이제야 되새긴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안다’

 

  소요유는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하며 노닐 듯 살아감을 뜻하는 '장자'의 철학적 개념이다. 장자는 거대한 붕새의 비상을 따라 우리를 광활한 하늘의 세계로 인도한다. “나는 고작해야 이 가지,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는 게 다이고, 몇 길 포로록 날아올랐다가 떨어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도 날아오름의 극치다.” 늙으면 죽음과 가까워지므로 그 불안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세상을 소풍 나온 정도로 여기는 소요유 정신이면 나이듦을 긍정하고 그 지점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도 있다. 시인은 그것이 쉽지 않은 꿈임을 알면서도 ‘섭섭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날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끝내는 날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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