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겨울 강/이인숙

모든 2 2018. 4. 12. 01:08



겨울 강/이인숙

    

울 강은 흐르지 않는다

새끼오리의 자맥질 파문으로 생존을 알리고

모감주나무 밑 발자국 소리로 하루를 더하며

다리 밑 얼음 강이 닿아있는 검은 울음으로

지는 해를 배웅할 뿐

얼음 위 돌멩이가 녹으면서

검은 울음이 노래로 몸 바꾼다는 것을

강둑을 거슬러 돌아올 때서야 알았다

버들가지는 초록을 물고

가지 끝이 길어지고 환해질 때까지

까치들의 수상한 움직임도 반갑고

강가 녹지 않은 눈 한 자락에

가슴속 푸른 그리움의 집 짓고서

한동안은 그 겨울 끄트머리를 서성거릴 것이다.

 

-시집『오리보트』(학이사, 2014)-




  시를 다시 읽자니 겨울 강이 소묘된 한 폭 그림이 선연히 떠오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하마터면 눈가에 이슬이 맺힐 뻔했다. 겨울 강은 다채로운 물감이 필요치 않다. 온기 잃은 창백한 회색이며 가느다란 심상, 그리고 희미하게 드러난 초록의 꿈과 짧은 기다림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림은 말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는 말이 있다. 이인숙 시인은 그림도 그렸던 사람이라 그런 걸까. 그 말이 유니크하게 와 닿는다.

 

  그림이 우리의 육감 중에 시각을 자극하고 시각에 호소하여 구체적이고 선명한 인상과 생생한 느낌을 얻는 것이라면,시는 우리 마음의 눈을 자극하고 호소해서 구체화된 인상과 느낌을 얻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겨울 강’이란 시는 말로 만들어진 그림 즉 시의 회화성이 분명히 드러난 시이다. 다만 독자가 시를 읽으며 마음에 어떤 영상을 떠올리느냐 하는 점은 조금씩 편차가 있을 수 있다.

 

  시에서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공간세계가 있다. 우리가 두 눈으로 그림을 보고 감상하듯, 마음의 눈을 통해 시적 세계와 공간을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적 세계를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주며, 구체적인 의미의 말들을 감각적 지각적 대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감각경험의 모사가 이미지인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물들의 새로운 모습과 의미들을 시인의 통찰력과 직관에 의해서 우리의 눈앞에 전개시켜주는 시 언어의 핵심이며 본질이라 하겠다.

 

  독자들은 이미지에 기대어 마음속에 뻗어오는 시적 의미와 사물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면 되는 것이다. 겨울 강가 무념의 시간을 저어 시린 핏줄의 버들가지 끝에 주파수를 맞추다가 화들짝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날아오르는 까치에 눈길을 준다. 저절로 그리움의 온기가 가슴 가득 차오르고 ‘한동안은 그 겨울 끄트머리를 서성거리'겠으나, 머지않아 힘줄처럼 가지 끝 이파리는 되살아올 것이다.

 

  무명 시인 이인숙은 3년 전 오늘, 첫 시집이자 종결 시집인 <오리보트>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리저리 흩어진 원고를 급히 정리해 이틀 만에 허접한 글이지만 발문을 붙이고 지인들의 십시일반 도움을 받아 부랴부랴 책을 냈던 일이 엊그제 같다. 시 안에서 그릇이 달그락거리고 꽃이 피고 강물이 흐르고 눈이 내렸다. 죽기 사흘 전 호스피스 병동에 누워 황달로 퉁퉁 부어있는 그녀의 손에 시집을 쥐어주었다. 정식으로 손을 삼초 이상 잡아본 게 그때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나이도 같고 동네친구였던 그녀가 자주 걸었던 동촌 겨울강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서성거리는 그의 부재를 잠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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