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두 가지의 나/김지용

모든 2 2018. 4. 12. 01:01



두 가지의 나/김지용

게는 두 가지 모습의 그림자가 있었어.


하나는 나를 닮은 녀석이고

또 하나는 커다란 피아노의 모양을 닮은 녀석이었지.

 

누가 진짜인지......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지.

그리고 나를 약 올리는 가짜 녀석을 찾아내어,

혼을 내주고 싶었지.

 

어느 날인가 길을 걷다 문득 바라본 그림자는

분명 나의 얼굴과 몸을 닮았는데

또 어느 날인가의 그림자는

분명 피아노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든.

 

나는 지난 밤 달빛 사이로

나의 진짜 그림자를 찾아냈어.

 

그 그림자 녀석은 나의 얼굴과 몸을 하고,

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더군!

 

-포토에세이집 『클래식 보헤미안』(문학동네, 2010)-





  사무엘 웰스리는 3세에 오르간을 쳤고, 리처드 스트라우스는 6세에 작곡을 시작했으며, 베토벤은 8세에 연주회를 가졌다. 쇼팽은 9세에 첫 연주를 시작했고, 슈베르트는 11세에 중요한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용은 5세에 피아노로 찬송가를 두드렸다. 이를 본 미국 메네스 음대 학장과 김유리 교수는 미국 유학을 권했고 가족은 지용이 여덟 살 되던1999년 지용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 지용 아빠는 당시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였고, 성악가인 엄마는 운영하던 음악학원을 접고 세탁기술 하나 달랑 배워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다음은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에 소개된 글이다. “지용은 매우 인상적인 건반악기에의 통제능력을 가진 피아니스트이다. 관객을 벽으로 밀어 붙이는 듯한 쓰나미를 남긴 코릴리아노 에튀드 판타지에서 대담하게 곡을 길들이는 모습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쿵쿵 울리는 느낌 따위는 없는 격렬한 연주로 악기 밖으로 마치 오르간 같은 반향을 이끌어 냈다. 라벨의 라 발스는 도입부에서 감탄스러울 정도로 명쾌한 동시에 심지어 가장 어려운 패시지에서도 음악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등, 이 또한 절묘한 연주였다.” 이만하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행 이삿짐을 잘 싼 셈인가.

 

  이 글은 시가 아니다. 365일 세계를 무대로 연주여행을 다니는 클래식 보헤미안 ‘앙상블 디토’의 열아홉 살 피아니스트 지용이 그들 멤버와 함께 꾸민 포토에세이에 실려 있는 낙서에 가까운 독백체 글이다. 어느 날 자신의 그림자와 피아노 형상을 띈 또 다른 낯선 그림자가 전격적으로 만났다. 달빛을 받으며 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는 융합된 그 모습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혼돈과 갈등을 극복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린 내용이다.

 

  ‘앙상블 디토’는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실내악 프로젝트이다. 팀의 리더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한국 관객에게 실내악을 소개하고자 2007년부터 시작한 ‘디토’는 이제 실내악을 넘어 클래식음악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을 미션으로 한다. 멤버에는 고 피천득 선생의 외손자로도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스테판 피 재키브’등도 포함되어 있는데, 지용도 줄리아드 음대 재학 기간을 포함해 지난 6년 동안 그들과 함께하며 매년 고국을 방문해 순회공연을 다녔다.

 

  데뷔 당시부터 ‘디토’는 음악뿐 아니라 화려하고 차별화된 마케팅과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통해 연주자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소개되었고, 이는 클래식계의 아이돌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 음악 앵콜 연주, 홍대 앞에서의 클래식 연주회, 롯데 백화점 광고 모델 출연, 해외 화보 촬영, 뮤직비디오 제작, 미디어 아티스트와 함께 한 영상퍼포먼스, 그리고 2010년 '문학동네'가 기획한 포토 에세이 발간까지 클래식 연주인으로는 파격적인 활동들로 화려하게 주목받았다.

 

  그 열풍의 한 축에 ‘지용’이 있었다. 그동안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 나는 지용의 개인연주회와 디토 공연에 다섯 차례나 가족에게 제공되는 초청티켓(지용은 내 외사촌동생 김관호의 아들이다)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을 마친 뒤 출연자대기실에서 볼 때마다 조카라서가 아니라 해가 갈수록 더 멋지고 성숙해 보였다. 빗소리, 물방울과 물방울이 뒤엉키는 소리를 연주하고 싶다는 지용, 바닥을 탁 치고 튀어 오르는 농구공의 탄력을 좋아하고, 스카이다이빙을 해 보고 싶다는 지용, 노숙자를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 갖기를 소망하는 지용이다.

 

  음악적 해석이 달라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꺼려하는 발레 무대에서 발레리나 강수진과의 협연도 오래전 이미 가진 바 있지만, 줄리아드 선배 ‘레이디 가가’와의 콜라보레이션은 얼마나 멋질까 생각하며 남들이 안하는 짓(?)을 꿈꾸는 지용. 이미 세계적인 무대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인정받고 있는 지용은 “오랜 전통 속에 갇혀 있는 클래식을 해방시키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지용은 다른 장르와 교류하면서 더 많은 감흥을 얻고, 그 감흥이 클래식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는다고 생각한다.

 

  지용은 말했다. 이렇게 재미있게 연주를 해야 오래할 수 있다고. 삶의 전부인 피아노를 평생 하고 싶기 때문에 즐거운 길을 찾는다고. 어린 시절 지용의 연주를 눈여겨 본 한 스승은 그 당시 이미 어린 지용이 피아노 앞에서 시를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명동 한복판에서 도시인들을 위한 클래식 게릴라 콘서트를 갖는 일이나, 지난 12월25일 전석이 매진된 '유키 구라모토+신지아+지용' 예술의 전당 크리스마스콘서트의 달콤한 조합도, 언젠가 있을지 모를 詩와의 융합도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내일모레(1월26일) 만 스물여섯 번째 맞는 생일을 축하하며 예술적 꿈의 성취를 ‘아재’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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