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자본론/백무산

모든 2 2018. 4. 12. 01:26



자본론/백무산

 


잡아 그의 재산이 5조원을 넘는단다

그 돈은 일년에 천만원 받는 노동자

50만년 치에 해당한다

한 인간이 한 세대에

50만년이라는 인간의 시간을 착취했다

50만년!

 

불과 1만년 전에 인간은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5만년 전에 크로마뇽인은 돌과 동물의 뼈로

은신처를 짓기 시작했다

10만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은 죽은 사람을 묻을 줄도 몰랐다

150만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유럽과 아시아에 첫발을 디뎠다

500만년 전에 침팬지와 구분이 어려운 인류의 시조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했다

현대 인간은 4만년 전에 겨우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4만년!

 

우리들의 투쟁이 돈이 아니라 돈으로 왜곡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인생의 세월을 되찾는다는 것을

틀림없이 확인해야 한다

자신의 인생과도 싸워야 한다

 

-시집 『인간의 시간』 (창비, 1996)-





  이 시가 나올 무렵에 5조 원이 넘는 자산가라면 이건희 회장 정도일 것이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그의 재산은 18조에 육박한다. 어제 특검에 불려가 22시간 조사를 받고 나온 이재용 부회장의 재산이 약 8조 원이다. 그들의 재산이 세 배 넘게 불어난 만큼 노동자의 연봉도 함께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단순추정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시인이 계산한 ‘시간의 착취’도 ‘50만년’이 아니라 60만년 이상으로 증가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기본적으로 노동의 잉여가치 생산과 그것을 전유하는 자본가와의 갈등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력은 단순히 하나의 상품이고 그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가 임금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에게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주고도 남을 정도의 잉여노동을 강제함으로써 잉여가치, 즉 이윤을 생산하며 노동자가 생산한 이윤을 자본가 자신이 전유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이 가져온 다른 칼날을 주목하였다. 그는 자본가가 부를 가질수록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착취의 고리로 자본주의를 바라보았고, 이는 노동자들을 자극하게 된다. 기계는 노동력의 착취를 더 효율화시킬 뿐이라고 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한 것은 사유재산의 폐지와 같은 사회적 시스템을 통하여 인간 사이의 차별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꿈꾼 자본주의 비판은 실로 거창하고 거대한 것이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는 사유재산제도의 완전 폐기에 동의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분배가 고르게 잘 되어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데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이견이 없다. 그런데 과거 성장 우선주의자들이 국민들에게 외쳤던 소리가 “허리띠를 졸라매자”였다. 일단 성장을 위해서 국민들에게 인내를 요구하고 국민들의 소득을 제한하겠다는 뜻이다.

 

  일단 파이부터 키워놓고 그 다음에 나누자는 것이다. 분배는 훗날 생각하자는 거다. ‘미안하지만’ 당장은 불평등 양극화도 두고 보겠다는 의미다. 우선은 부를 부자들에게 몰아주어 그들이 투자를 하게끔 하고 고용을 창출케 하여 소득의 증대를 기대해보자는 논리다. 여기가 바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국민들은 ‘봉’이고 자칫‘개, 돼지’가 될 수도 있다. 이게 과거 박정희 시대에서부터 보수정권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부국 경제논리다. 물론 김대중 정부이후 분배 부분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아직도 재벌과 노동자의 차이는 ‘50만년’이다.

 

  지금은 국민들의 주머니 사정으로 대량의 수요가 창출되지 않고 있다. 기대수요가 없는데 투자가 창출될 리도 만무하다. 거대자본을 상대로 투쟁하는데도 한계가 있고 맞설 수단도 없다. 유일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투쟁이 돈이 아니라 돈으로 왜곡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인생의 세월을 되찾는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투쟁은 되찾음이며 원래 모습으로의 되돌림이다. 자본에 의해 잃어버린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신의 인생과도 싸워야 한다’ 어쩌면 내가 시를 만지작거리며 노는 이유도 그런 수단의 일부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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