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안동 성당(대전남부지구)
본당 설립:2014.1.15/주보 성인:오상의 성 비오
+ 마르코 복음 1,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기록된 대로,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오시는 주님 -김유정 유스티노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톨스토이의 민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구두수선공 마르틴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접어듭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르틴,마르틴! 내일 길을 잘 보아라.내가 갈 터이니."
다음날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길가를 내다보았지만,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길에서 눈을 치고 있던 노인이 보이기에 그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했고,아기를 업고 추위에 떠는 여인에게 음식을 내주고 목도리를 사라며 약간의 돈을 주었을 뿐입니다. 해질 무렵에는 사과장수 할머니의 사과 한 알을 훔치려다 발각되어 혼나고 있는 아이를 보고 달려 나가 사과값을 대신 치러 주려 했습니다. 마르틴의 행동에 할머니는 마음이 누그러져 아이를 용서해 주었고, 돈도 마다하였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으려다 조용히 소곤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르틴,마르틴.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마르틴이 되물었습니다. "누구를요?" 그러자 갑자기 어둠 가운데 노인이 나타나더니 빙그레 웃으며 사라졌습니다. "그건 나였어." 아기와 엄마가 나타나더니 조용히 미소 짓고는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나였어." 사과장수 할머니와 아이가 나타나 빙그레 웃다가 사라졌습니다. 마르틴이 성경에 눈을 돌리자 다음 구절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것이다."(마태25,40)그제야 마르틴은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하루 종일 찾아오셨고 자신은 그리스도를 대접했다는 사실을.
대림 제2주일은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인권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인권을 수호하는 길은 매일의 삶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존엄함이 사회의 제도나 구조의 모순 때문에 훼손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제도와 구조를 복음의 가치에 비추어 보고 이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노력이 구체적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 사회교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강생의 형제자매들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고 있음"(『복음의 기쁨』,179항)을 깨달으며 사회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할 때에 우리는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 구세주의 오심을 말과 삶으로 세상에 선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작지만 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우리가 사는 이 나약한 세상과 사람들을 보살피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216항)
via의 시선(무엇을 해야 할까?)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비판의 사유가 전혀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부당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당한 비판은 나와 상대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거나 상대가 나라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배려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비판은 새로운 합의를 위한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를 다르게 바라본다는 이유로 형성된 상대에 대한 존중이 사라질 때 비판이 비난으로 변질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입을 닫습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의도적으로 침묵을 선택합니다. 갈등을 피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고,침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평화(?)를 누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침묵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아니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스스로 공부하게 되면서 성찰의 주제가 된 질문입니다.
"침묵함으로써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조금 삐딱하지요. 그런데 질문에 대한 답이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침묵함으로써 얻은 것이 없습니다. 침묵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부의 편중과 일상화되고 보편화된 가난,자원화된 존재와 폐기가능한 인간,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의 다른 이름인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폭력의 일상화,"양(量)만을 기초로 하는 경제는 무와 무한,무제한적인 욕망과 궁극적 소멸을 향해 내달린다."는 웬델베리의 현실 분석에 동의하는 저를 봅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눈치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 혹은 해야 할 말에 집중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관념적 평화를 추구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릿 속의 평화,잘못된 평화주의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지금 여기에서 세상에 오시는 임마누엘 하느님과의 상봉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느님 자비"의 뜻을 곱씹는 오늘입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90)>
이유가 같다면 사랑이다
얼마 전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엽기적인 제목 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강의를 하게 되어 할 수 없이 보게 된 겁니다.
제목과 달리 영화 내용은 소년과 소녀 간의 순수한 사랑을 다룬 것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감독의 섬세함과 배우들의 풋풋한 연기,그리고 맛깔나는 대사들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중에 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장난기 많은 소녀가 수줍음 많은 소년에게 첫사랑을 언제 해 봤는지 말해 달라고 조르는 장면입니다. 자꾸만 짓궂게 다그치는 소녀의 질문에 소년은 조심스럽게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애는 특이한 데가 하나 있었어.세상 모든 것들에 '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불렸지만,의자님,운동화님,나무님..모든 것들을 존중하려는 그 애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어."
그러자 소녀가 놀랍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첫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냐고 소년이 묻자,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 첫사랑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네가 그 애를 좋아하게 된 그 이유에 놀란 거야."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 소년의 그 이유에 동감하면서 소녀는 그를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소녀의 그 말 한마디는 제게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했습니다.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그것을 왜 했는가에 동감할 때 사랑이 싹뜨기 시작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무엇을 좋아하느냐,무엇을 할 거냐,무엇을 할 줄 아느냐?"라고 자꾸 묻는 사회보다, "그것을 왜 하려고 하는지"를 묻는 사회가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를 묻는 사람들과 그것을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를 꿈꿔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한 걸음 한 걸음
내 맑은 영혼으로
주님 말씀 따라
우리 함께 걸어갑니다.
복음의 기쁨을 전하며
모두함께 걸어갑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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