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정동 성당(대전남부지구)
본당 설립:2001.1.30/주보 성인:성가정
+ 요한복음 1,6-8,19-28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하고 묻자,요한은 "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말씀의 향기>
당신은 누구요? -이상옥 요셉 원신흥동 주임
대림 제3주일은 기쁨의 주일입니다. 그 이유를 입당송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기뻐하여라,거듭 말하니,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필리4,4-5참조)
주님의 성탄이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기쁨은 더욱 커 가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이사 61,10)
화답송에서도 "내 영혼이 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네" 라고 노래합니다. 반짝거리는 불빛들이 걸려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와 흥겨운 캐롤송이 들려와서 기쁜 것이 아니라. 구세주께서 바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고 함께 하심에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죠.
2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더 구체적으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밝혀 주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5,16-18)
하지만,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그토록 간절히 다윗시대의 번영을 이루어 줄 구세주를 기다려 왔지만 정작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혹시나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이 기다리던 그분이 아니실까 궁금해 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리스도도 아니고,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누구인지를 좀 알려 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큰 기대와 관심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왔다고,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고,내 뒤에 오실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자신을 더 드러낼 생각이나 자랑할 욕심도 없고,사람들이 더 알아주고 인정해 주길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살아갈 따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당신은 누구요?" "저는 원신흥동 성당 주임신부입니다."이 대답 속엔 일단 사제이고,원신흥동성당 소속이고,주임신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제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사제로서의 삶을 제대로 잘 살고 있을까? 원신흥동성당의 교우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본당신부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걸까? 내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내가 인정받고 드러나기보다,세례자 요한처럼 교우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을까?"
세례자 요한이 받았던 "당신은 누구요?"이 물음을 우리에게도 해 보아야하겠습니다. 엄마로서,아빠로서,자녀로서,일터의 한 구성원으로서,천주교 신자로서,성직자.수도자로서..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엔 제대로 모르는 듯이 불충실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기다림의 시기,깨어 준비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다시금 각자가 있어야 할 그 자리,살아가야 할 자신의 몫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 살펴보게 됩니다.
기쁨의 주일,성탄의 기쁨을 노래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via의 시선(예수의 짐)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당에 앉아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지신 예수가 그려진 거대한 벽화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창과 못 그리고 가시관에 찔린 상처를 그대로 안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는 십자가의 예수를 의미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셨던 예수,그분이 당신의 제자인"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진 너,"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은 가볍지 않습니다.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고 살아야 하는 물리적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지역과 환경에서 그리고 그곳에서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살아낸다는 것,더군다나 하느님의 자녀로써 -창조된 존재-의 삶을 유지하고 지속시켜야 하는 현실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부자로 태어나지 못해서 흙수저로 살아야 하고,시류에 편승하는 명민함이 없어서 그리고 아첨하지 못한 덕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들,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개,돼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피부색이 검정색이어서 천대당하고,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야 하는 땅에서 태어난 죄로 굶겨지고 결국은 버려지는 사람들. 아! 너무 많습니다.
삶이 무겁습니다. 가난해서 무겁고,힘이 없어서 무겁습니다. 먹지 못해서 무겁고,버려질 것이 두려워서 무겁습니다. 삶이 무겁습니다. 삶이 무거운 사람들을 보고 있어서 무겁고,그들이 살고 있는 가난과 폐기되고 버려지는 현실을 목격하는 것이 무겁습니다. 즐거움의 농도가 짙어지고 소수에 집중되는 만큼,세상(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무거움의 크기는 몇 배로 더 커져갑니다. 꿈을 꿉니다. 골고루 가난해질 수는 없을까? 그리고 곧 바로 알아차립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죽으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이유 그리고 그분이 짊어지신 무게의 크기를.
무거운 짐을 져야 갈 수 있는 길,그것은 예수를 향한 길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셨던 그리고 아직도 무거운 짐을 지시고 계신 분,그래서 그분은 무거운 짐을 진 당신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 속에서 현존하시면서,그들이 짊어진 짐이 당신이 짊어지신 짐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분이 누구이신지.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준비 운동 후 대화 시작
어떤 말을 할 때 상대방이 생각보다 내 말뜻을 못 알아들어 답답했던 적이 있을 겁니다. 혹은 내 생각을 잘 전달한 것 같은데, 나중에 엉뚱한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마치 이방인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면, 우리는 종종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어쩜 저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들을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히려 상대방이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이 매우 신기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말을 듣는 쪽 사람들은 충분한 이해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벼운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은 몇 번 생각했던 걸 말합니다. 하지만,듣는 사람에게 그 말은 처음 듣게 되는 거라 그 말의 맥락을 가늠하기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길게 말하는 사람의 말도 듣는 사람에겐 짧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거라 본의 아니게 많은 단어나 문장들을 생략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내 말을 금방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거나 미워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전혀 준비 운동을 시키지도 않고 누군가를 수영장에 밀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 안에서 사람들끼리 대화를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행복한 대화가 되려면 먼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한 번 말한 걸 서너 번 더 이야기해야 그게 처음 말한 것과 같고,충분히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조금 더 길고 자상하게 이야기해야 그게 최소한의 설명이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우리에게 여러 번 되풀이 하십니다. 우리가 못 알아들을까 의심해서가 아니라,그 말씀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깨달을 수 있는 준비 운동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기도하며
간절하게
기다리면
이 순간이
어느 날 꽃으로
필 거예요.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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