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대림 제1주일 2017년 12월3일(나해)

모든 2 2017. 12. 3. 22:30

입장성당(천안동부지구)

본당 설립:1966.8.17/주보 성인: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마르코 복음 13.33-37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저녁일지,한반중일지,닭이 울 때일지,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말씀의 향기>


기다림! 희망과 자비의 만남  -권세진 알베르토 온양풍기동 주임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대림(待臨)시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누군가 또는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이 기다림의 대상을 통해 아직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더구나 그 고대하는 것이 다름 아닌 주님이라고 한다면,풍요로운 물질의 소유 속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며 적당히 안심하고 있는 우리 삶의 처지가 사실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유배와 귀환을 배경으로 노정(露呈)되고 있는 이스라엘백성의 혼란스러운 처지와 죄악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강렬히 청하고 있는 오늘 제 1독서의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며 소유를 통해서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세속주의적 사고의 허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탄생과 죽음이라는 생명활동의 양대 축 안에서 유한한 존재자인 사람의 참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이제 "저희는 진흙,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 64,7)라는 고백처럼 사람은 자신의 기원과 삶 전체의 주도군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자신이 범한 죄악과 그 결과인 죽음으로 상징되는 고통과 무질서를 넘어서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됨을 알기에 '주님,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우리의 구원자이시니,하늘을 찢고 내려오소서!"(이사 63,16,19참조)라는 절박한 외침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사람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 한복판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분을 발견한다.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라는 그 절박한 외침에 응답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성실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불러 주셨고,(1코린1,9참조)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사람을 휘감고 있으며 주님의 섭리가 단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인간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원죄 이후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길 고대하며 신음해 왔던 모든 피조물들이 마침내 주님의 날에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은 사람이 자신과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게 한다.(로마 8,19-25 참조)이제 인생은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 속에 구원에 대한 희망이라는 사람의 응답으로 수놓아진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강력하게 보호하시며 이끌어 가실 것이다.(1코린1,1,8참조)

 

  오늘 복음의 가르침처럼 신앙인들조차 부지불식간에 물들어 있는 세속주의적 사고와 생활에서 벗어나 반드시 오실 주님을 향해 깨어 있을 때,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 속에서 우리 삶에 대한 구원의 희망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시기가 은총의 대림시기임을 발견할 수 있다.

 

 

  via의 시선(좋은 것)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연비가 가장 좋은 차를 타고 있습니다. 한 번 경유를 채우면 떨어질 줄 모릅니다. 대전에 온 이후로 걷거나 버스 혹은 지하철을 이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차 연비가 좋아졌습니다. 때론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주차장에서 편안한 쉼을 하고 있는 차를 볼때마다 걱정이 됩니다. 엔진이 잘 돌아가는지 그래서 가끔 차를 깨우는 예식을 거행하기도 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 것이 좋을까?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무를 심으려면 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유하고 있는 땅이 없으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가급적 차를 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조금 불편합니다. 더구나 추운 겨울 저녁에 길을 걷다 보면 차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마땅한 방법이 없는지 찾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조금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으면서도 지구에 대한 미안함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아,전기차"입니다. 2인승 전기차,시내주행에 적합하고 동시에 집에서도 충전이 가능한 미니 전기차.

 

  그러다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왜,불편하게 지내면 안되는 것일까?"우리는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미디어와 사람들은 불편한 것이 좋다고 아니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불편해야 한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경험하는 아이러니이입니다.

 

  편하게 지내면 좋은 사회에서,사람들은 건강을 유지하고 지켜야 한다는 구실로 의지적으로 불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먹기에 불편한 음식-많은 구강 운동이 필요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위협(?)하고,숨차게 걷거나 달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기구를 잡고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르게 묻고 싶습니다.

 

  "건강하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면,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상의 불편함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자동차 대신에 자전거로,대규모 농산을 대신에 소농 중심의 농산물로,기계 대신에 인간노동력으로,일상의 불편함은 몸의 움직음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몸의 움직임은 건강의 유지와 직결됩니다.

 

  걸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뛸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손에 톱과 망치 그리고 삽과 괭이를 들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몸의 움직임 -적당한 피로를 느끼는 몸-이 증거하는 사실,"살아있음!",느낄 수 있어서 좋고 감사한 오늘입니다.

 

사족) 불편해야 하는 것,"쉼이 없는 노동이나 강제적수단에 의한 노동은 분명한 악이며,노동을 근로로 타락시키는 모든 시도는 거부되어야 하는 어둠입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89)>

  

동반자와 해결사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모처럼 만에 휴가를 얻게 된 한 사람이 여행계획을 세워 봅니다. 처음 가 보는 곳을 목적지로 하고 무엇을 준비할 지 꼼꼼하게 목록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준비를 마친 후,그 사람은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수첩을 꺼내 깨알같이 적혀 있는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읽어 나가면서 누구와 함께 여행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한 그 사람.


  마침내 최종적으로 두 명의 친구가 후보로 남았습니다. 한 친구는 문제를 잘 해결하는 해결사 스타일,다른 친구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함께하려는 동반자 스타일의 친구였습니다.


  둘 다 필요한 친구들이었지만 한 사람만 갈 수 있는 여건이라 결국 고민 끝에 한 사람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반자 스타일의 친구로 말입니다.


  여행은 문제 해결을 위해 떠나는 짧은 길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긴 여정이라는 걸 그 남자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행복하고 더 의미 있는 교구 공동체를 완성하기 위해 시작한 시노드의 긴 여정이 드디어 이번 달 8일로 본회의 개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시노드란 "함께 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함께 걷자는 것은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이라기보다,서로 다른 입장을 함께 공감해 보자는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결사는 해결의 결과에 매달리지만,동반자는 공감의 과정에 집중합니다. 시노드의 여정이 해피엔딩이 되려면 가장 먼저 동반자로서 서로가 서로를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공감이 반이기 때문입니다.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이 길을

처음 지나간 사람은

누구일까.

 

한 사람이 지나고

두 사람이 지나고

마침내 모두 지나는

 

이 길에는

환한 꽃처럼

우리가 함께 피어있구나.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