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대림 제4주일 2017년 12월24일(나해)

모든 2 2017. 12. 24. 22:30

 

천안용곡성당(천안서부지구)

본당 설립:2015.8.19/주보 성인:성가정

 

루카 복음 1,26-38

 

<보라,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을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말씀의 향기>

 

"지금"받아들이게 하소서  -김영재 콘스탄티노 규암주임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세상 구원을 계획하시고,그 뜻을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알려주셨지만,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마리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하신다.

  왜 하느님께서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마리아를 통하여 구원 계획을 실행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던 중,오늘 복음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한다는 점이다. 처녀였기에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이 구절이 더 이상 당연한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약혼한 처녀였다. 마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할 것이고,아이를 가질 것이다. 결혼을 앞둔 여인에게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라는 천사의 알림은, 결혼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고라고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알림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마리아가 천사의 알림을 결혼 후에 일어날 훗날의 일이 아니라,지금 당장(결혼 전에) 일어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리아는 "미래의 일"로 이해될 수 있는 천사의 알림을 "지금"이라는 "현재"의 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지녔고,그 점이 구약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른 점이었던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획과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지금" 이루어질 일이 아닌 "훗날"이루어질 일로 여겼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곳을 물었을 때,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유다 베들레헴입니다."라고 알려주지만(마태 2,1-12참조)."지금"메시아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흘려버린 것처럼 말이다.

  만약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동방박사의 말을 "지금"의 상황으로 이해하였다면,그들은 동방박사들을 따라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마리아도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수석사제,율법학자들처럼 천사의 알림을 "지금"이 아닌 결혼후에 이루어질 일로 여겼다면,아니 그러한 신앙을 가졌다면 구세주의 탄생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구약의 많은 신앙인들을 제쳐두고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특별히 선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오늘 이루어지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미래의 일로 여기며 천천히 반응하지 않고 오늘의 일로 받아들이며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신앙, 그것이 마리아의 신앙이고 특별함이었다.

  오늘은 대림의 마지막 주일이지만,공교롭게도 오늘 밤은 성탄성야이다. 대림시기를 마감하고 성탄을 맞이하며 '오늘","지금"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마리아의 특별함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으로 자리매김할수 있는 은총을 조심스레 청해 본다.

 

 

via의 시선(성탄을 축하합니다.)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눈으로 가득차 하늘까지 하얗게 만들었던 어제와 다른 오늘입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됩니다. "참,시간 빠르게 지나간다!" 12월의 마지막 주간을 향해서 쉼없이 걸어가는 오늘,누군가는 호기심에 가득찬 얼굴로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매일이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며 지루한 얼굴로,그렇지 않기를 희망하지만,누군가에는 시작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무표정의 얼굴로 시작될 것입니다.

 

  나의 얼굴을 찾습니다. 지난 시간 속에서 그려온 나의 얼굴을 찾습니다. 다양한 얼굴이 보입니다. 기쁨과 슬픔,지루함과 무표정과 분노의 얼굴들. 그러고보면 저는 시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주는 감정에 반응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때론 감정을 숨기고 경험과 불일치는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그것이 상처로 남아있지만,상처를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의 제 모습이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집니다. 상처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발생합니다. 때문에 상처를 직면하기 위해서는 그때의 경험,즉 구체적 사건을 직면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전보다 버티고 위로하며 보듬을 수 있는 힘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존재는 목적을 지닙니다. 목적없이 태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한,존재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경험하고 누릴 때 존재의 목적이 완성됩니다. 유보된 행복은 무감각으로의 도피이고,타인에게 저당잡힌 행복은 굴종입니다. 행복을 살기 위해서 행복을 포기하는 위험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가만히 있어야 하고,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 경험해야 하는 기쁨을 미뤄야 하는 사회,좋지 않습니다.

 

 성탄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을 관상하는 시간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감탄이 땅위에서 증거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땅 위에서 백성들과 함께 춤추시면서,같은 밥상에서 나누어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당신의 백성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주님과 더불어 지상에서 누리는 해방과 기쁨,회복된 인간으로써 존재하는 기쁨으로 가득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시고 계시는 주님의 손을 잡고,창조의 완성을 위한 길을 이웃과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름다운 지각

 

 

  매년 성탄절이 되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평생 세 번씩이나 중요한 타이밍에 일이 꼬였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루비와 청옥,진주를 예물로 준비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네 번째 동방박사 '알타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는 길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루비를 팔아 그를 돕다 베들레헴에 늦게 도착해 아기 예수를 뵙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어긋남이었습니다.

 

  두 번째 어긋남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해 이집트를 향해 가던 길에서 발생합니다. 군인들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한 갓난아기를 발견하곤 청옥을 건네주고 아기를 구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예수님을 볼 기회를 놓치게 된 거죠.

 

  33년의 세월이 흐른 후 골고타 언덕길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에도 일이 어긋나고 맙니다. 예수님을 뵙기 직전 매를 맞고 노예로 팔려 가게 된 소녀를 발견하곤 마지막 예물이었던 진주마저 팔아 그 소녀를 구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겁니다.

 

  마흔 살의 나이에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가 일흔 살이 넘어 드디어 예수님을 뵙게 된 그 순간마저도,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다가 번번이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된 알타반..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네가 약한 사람들에게 베푼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네가 만난 그 사람들이 바로 나다."

 

  평소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바쁘다는 이유로 종종 지각하기 마련인 우리들,하지만,그 지각의 이유가 알타반의 경우와 같다면 예수님도 언제나 우리를 반기시지는 않을까요"

 

  번번이 예수님과의 만남에 지각했으나,이미 예수님께서 마음 안에 자리하고 계셨던 알타반의 기적을 기억하면서 아기 예수님을 뵈러 가는 발걸음이 더없이 가볍고 편안해집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카랑한

새벽별

오늘 아기예수님

우리를 위한

평화를 위한

자비를 베푸시어

그 빛 환하게

우리에게 오시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