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16주일 2017년 7월 23일(가해)

모든 2 2017. 7. 23. 22:30

 

 직산 성당 (천안 동부지구)

본당 설립 : 2003.1.14/주보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 마태 복음 13,24-43

 

<수확할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하고 묻자,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상 창조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말씀의 향기>

 

주님 앞에 선 나는 실한 밀인가,가라지인가?  - 오남한 루카 조치원 주임

 

 

  농사라는 것이 반드시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분명코 농부는 좋은 씨를 선별하여 뿌렸건만 어느 사이인가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고 있으니 허탈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사람들은 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몰래 덧 뿌리고 가는 정말 고약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우리가 되면, 비가 알맞게 내려 밀과 가라지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밀과 가라지는 너무나 비슷하여 농부들조차도 구별이 어려웠으니, 보통 사람들이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결국 농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밀과 가라지에서 똑같이 거름을 주고 김을 매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만 한다고, 농부가 추수를 기다리듯이 가라지는 가려지게 마련이듯이, 곧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가려진다고 말입니다. 그 수확의 때가 세상종말의 때가 되는 것입니다. 수확 때가 되면 알곡은 거두어져서 비도 피하고, 쥐도 새도 파먹지 않는 안전한 곳간에 보관되는 것처럼, 의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만, 가라지같이 악을 저지르면 불구덩이에 던져질 뿐이라고 말입니다.

 

  비유인즉슨,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니 주님 말씀대로 남을 죄짓제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는 자들은 가라지인고로, 불구덩이에 던져질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선 나는 실한 밀인지, 아니면 태워 없어질 가라지인지를 성찰해 내야 할 것입니다.

 

  가라지라. "사람들은 자신과 돈만 사랑하고, 허풍을 떨고 오만하며, 남을 중상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하느님을 무시하며, 비정하고 매정하며, 남을 험담하고 절제할 줄 모르며, 난폭하고 선을 미워하고 배신하며, 무모하고 교만하며,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을 부정하는 자,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2 티모 3,1-5 참조)

 

  결국 가라지는 그리스도의 적(敵)이 되니, 경계하고,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될 일입니다.

 

 

via의 시선(그 자리) -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닙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목적지에 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시외지역을 가야 하는 일정이 있을 때만 운전대를 잡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버스의 빈 좌석을 발견할 때의 느껴지는 작은 즐거움은 덤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삽니다. 수많은 버스와 택시 그리고 지하철, 사람들로 채워집니다. 길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홀로 승용차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들... 정말로 많습니다.

 

   가끔 바쁘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멍하니 서있는 저를 봅니다. 빠른 속도로 시간과 공간을 채워야 하는 사람들,그 속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채움의 미덕과는 다른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피투 된 존재로써의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난 시간 속의 저는 일정한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평행선을 유지하기 때문에 가끔 누군가와의 만남이 이뤄집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삶 속에서 경험되는 파동이 일어날 때, 어느 순간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지점이 형성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천 년 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예수를 바라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짊어져야 하는 삶의 멍에가 너무 컸던 사람들입니다. 일상의 멍에 곧 생존을 위한 힘든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지도자들은 삶의 멍에 위에 율법의 멍에를 얹어주었습니다.

 

   백성들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멍에가 발생시키는 파동이 점점 커져갈 때, 백성들은 삶의 자리에서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 한 사람을 목격합니다. 그 사람은 지도자 그룹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과는 다른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꾸미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삶의 상태와 같지도 않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삶의 상태를 살아가는 사람, 그는 유다인이면서 유대인과 다른 이방인처럼 살았지만 백성들은 그와의 만남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라고 불리워지는 사람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봅니다.

 

   작금의 한국사회와 교회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자리에 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의 가치가 역할의 가치보다 우선합니다. 즉 리더가 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리더라고 불려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라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 "있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늘은 모든 끝에서 똑같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70)>

 

'감' 은 때로 '검'이다

 

 

  어떤 일을 반복해서 오래 하다 보면 '감'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처음엔 잘 몰라서 헤매다가 차츰 느낌만으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는 거죠.

 

이 '감' 은 참 중요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일을 하다 보면 단지 머리와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종종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은행원 중에 정확하게 한 번에 일정액의 화폐를 집어내는 달인들을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게 됩니다. 그분들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이 기계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식을 잘하는 숙련된 요리사는 단지 레시피에 적혀 있는 수치로만 요리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만의 손에서 느껴지는 요리 '감'으로 묘한 맛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감' 이 제대로 통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오고가게 되는 그 순간들입니다.


물론 한 사람을 오랜 시간 동안 자주 보게 되면 '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걸어오는 걸음걸이, 눈동자나 목소리의 작은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측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러한 짐작과 예측의 '감'은 때때로 편견의 '검'이 되어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만듭니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전하려고 하는 복잡한 이야기를 그냥 단순한 사실로 정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백번을 반복해도 결코 '감'으로 통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언제나 마치 처음 만나는 것처럼 한 사람을 만나는 그 감각만이 우리를 행복한 인간관계의 달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이 계절에는

가끔

들에 핀 꽃을 따

가슴에 안고

밤하늘 멀리

올려다보면 좋겠다.


그러다 어쩌면

밤새

마당의 들마루 위로


하얀 별들이

수북이 쌓일 수 있어.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