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암동 성당(대전 동부지구)
본당 설립:1993.8.10/주보성인:성 김대건 안드레아
+ 마태 복음 13,44-52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말씀의 향기>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21) -김경식 미카엘 해미성지 전담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희망'은 살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은 이는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떤 희망을 가진 이들일까요? 어쩌면 신앙인은 '세상의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보물을 찾기 위해 밭에 갔다기보다는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듯합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맞기도 합니다. 반면에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조선후기 실학자처럼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는 삶은 같은 일을 걸어갑니다.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만나 모든 이가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7)
심지어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떠납니다.(요한 6장) 예수님과 마주친 마귀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 그분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분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라고 말합니다.
'블루오션'이라는 경제용어가 있는데 이는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시장을 말합니다. 신앙인은 굳이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우리는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값진 보물을 팔아 쓰레기를 품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via의 시선(짧은 생각)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눈을 뜨고 숨을 쉬고, 보고 듣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면 살아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받을 필요는 없지만 가끔 확인합니다.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듣고 보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분명 누군가를 만났고 누군가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지 못합니다.
듣지 않고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듣고 보는 것으로 위장했습니다. 듣고 보았다면, 듣고 본 것이 감정의 기제가 되어 외면으로 발산되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저의 세포에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빈 공간 속에 있던 것처럼 느낌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남의 깊이가 낮아집니다. 만나는 사람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만남의 깊이가 낮아진 것 같습니다.
"척"하면서 이뤄지는 만남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만남이 성장의 자원이 되지 않고, 단순히 해야 할 의무로 느껴집니다. 일의 연속으로 짜여진 오늘 안에서 듣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듣고 보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나 이외의 타인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타인이 자신의 몸을 울리면서 내뱉는 소리에는, 그 사람이 처한 현실과 감정 그리고 희망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행위는 "아는 것"으로 확대되고 깊어집니다.
공감은 단순한 응대가 아닙니다. 자신 앞에 있는 구체적 인간을 만나는 것입니다. 공감은 존재와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공감의 바닥은"들음"입니다.
귀가 있는데 듣지 못하는 것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타인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공동체를 만나셨던 예수를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풍요롭고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 듣지 않고 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71)>
슬픈 모노드라마
어느 마을에 자기 스스로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수 위의 뛰어난 머리로 자신이 늘 한걸음 앞서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죠
타인과의 관계에서 절대 손해를 본 일도 없고,누구하고라도 좀처럼 불리한 관계를 맺지 않을 자신감으로 충만한 사람, 그는 매일매일이 승승장구의 삶이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겉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자신만의 영악한 계산법을 마음속 깊이 숨긴 채, 오히려 항상 본인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며 이중적으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늘 자신보다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며 생색을 내고,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며 온갖 현란한 말로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교묘하게 포장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그런 자신의 계산된 연기에 속아 넘어갈 때마다,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자신이 정말 영리한 배우라고 확신하며 의기양양해했던 겁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가 머릿속으로는 어떤 계산을 하고, 입으로는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이미 다 느끼고 있었습니다. 위선은 진실의 본능을 결코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내심을 갖고 그의 어설픈 여기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몰라서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깨닫기를 기도하며 기다려 준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살다보면 곧 드러날 잔꾀를 영리함이라 믿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본인만 눈치채지 못한 채 어설픈 연기로 순간순간을 모면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인생은 결코 득실을 저울질하며 때워 가는 임시방편의 무대가 아니라, 묵묵히 진실을 믿고 인내하는 견고한 무대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어느 날은
바람결처럼
흩어지는 시간을
잡으려 하지만
대부분
그냥
가고 말지.
그 시간이
오늘이기도 하고.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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