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 15주일(농민주일) 2017년 7월 16일(가해)

모든 2 2017. 7. 16. 22:00

 

용전동 성당(대전동부지구)

본당 설립:1984.3.20/주보 성인:성 김대건 안드레아

  

  +  마태 복음 13, 1-23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아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예순 배,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어떤 사람은 백 배,어떤 사람은 예순 배,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말씀의 향기>

 

함께합시다!!! -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대전가톨릭 농민회 담당

 

 

  소리가 들립니다. 성당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나는 소리 "딸랑딸랑!" 사제관 창문으로 바라본 이른 아침의 풍경 속에서 긴 숨을 품어내는 저를 발견합니다. 편의점 작은 식탁에 앉아서 라면과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 사람들,대부분 젊은 사람들입니다.

 

   열심히,아니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먹고 죽자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먹고 살자고 말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이유도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만 하고 제대로 먹지 않습니다. 먹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도 되는 선택사항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먹는 과정의 선물로 주어지는 자신 혹은 이웃과의 친교는 가끔 한번씩 준비하는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먹음은 먹거리를 섭취하는 행위를 넘어서는 관계 맺음의 상태입니다. 제대로 먹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과의 관계 맺음의 포기를 전제합니다. 그 결과 이웃과의 관계는 피상성과 효율성이라는 기계적 규칙으로 전환됩니다. 먹는 행위는 선택입니다. 자신과 이웃을 만나는 선택입니다. 그래서 먹는 행위는 매우 정치적이며 동시에 영성적이어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음으로써 살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품어내는 하느님의 품을 창조의 바닥이라고 부릅니다. 창조의 바닥은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 장소이고,이 바닥 위에서 하느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1,31)창조의 바닥은 생명의 터입니다. 그래서 생명수호를 위한 기본적이고 최종적인 전재는 창조의 바닥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창조의 바닥을 지키기 위해서 투시하고 있습니다.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만나면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느껴집니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교회도 무관심합니다.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서는 몇 시간을 소비하면서도 창조의 바닥을 살리는 먹거리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삶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급기야 무관심과 생활고에 지쳐서 땅 살리기를 포기합니다.

 

   그래서 희망합니다. 이 사람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창조의 바닥을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창조의 바닥을 지켜나가는 이들의 동반자가 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의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via의 시선(침묵을 꿈꾸다)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침묵의 시간을 보냅니다. 제가 있어야 하는 장소와 시간,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침묵으로 채워집니다.일부러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리울 때면,그리움을 느끼는 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리워하는 나"를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그리움을 느끼는 나의 모습에 감사를 드립니다. 누군가의 손이 필요한 나의 현실에 감사드립니다. 역설적으로 그리움을 느끼는 순간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은 순간에 '살아있는 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상합니다. 완벽하고 흠없이 무언가를 이뤄냈을 때의 성취 속에서는 '나'를 만나기가 어렵습니다.무언가 느껴지는 공유되는 어떤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특정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그저 웃고 축하합니다.

 

  사제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 밝습니다. 어둠이 낮으로 보일 정도로 강한 빛으로 뒤섞여 있는 공간,그 공간 속에서 침묵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낮은 '침묵의 시간'이 아닌 '행위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서 침묵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행위합니다. 낮과 밤의 구분이 사라진 공간에서 침묵은 어리석은 자들의 선택이 되어 버렸습니다.

 

  침묵을 위한 준비로 두꺼운 커튼을 설치합니다. 빛을 가리기 위한 방법입니다. 환하게 비춰진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감탄합니다. 어둠을 뚫고 드러나는 빛들의 아름다움,그런데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빛 때문이 아니라 어둠이 있어서 입니다. 그리고 빛이 드러내지 못하는 남아있는 어둠이,빛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역설이지요.

 

  이미 빛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순간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빛입니다. 누군가의 손으로 스위치를 켜야 발산되는 빛이 아닙니다. 이미 있던 빛,그래서 '존재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창조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창조의 순간의 부르심을 받은 어둠이 있을 때 더욱 빛을 발산합니다.

 

  이미 있었던 빛을 바라보면 입을 닫게 됩니다. 창조의 빛 속에서 경험되는 침묵,어둠이 빛으로 변형되어 나를 감쌉니다.

 

  차를 타고 어둠의 침묵이 가능한 곳으로 떠나고 싶은 욕구를 느낍니다. "현실의 나"와 "희망하는 나" 사이의 갈등,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오늘 행복하소서.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69)>

 

행복해도 되는 식당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모두를 행복하게 한 식당이 있습니다. 햄버거를 시켰는데 만두가 나오는가 하면,라면을 시켰는데 돈까스가 나오는 이상한 식당 이야기입니다.


  일본 도쿄시 도요스에 문을 연 이 식당의 이름은 황당하게도 "주문 실수 넘치는 식당"입니다. 이 식당에 가면 식당 이름처럼 주문대로 음식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여섯분의 할머니들 때문입니다. 할머님들은 모두 치매를 앓고 계십니다. 방금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기억하지 못하고 엉뚱한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이 다반사이신 할머님들...


  하지만 이 식당에서는 어떤 손님도 음식이 자신의 주문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화를 내지 않습니다. 실수를 하고도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시는 할머니들을 도와 드리며 손님들은 오히려 할머님들과 즐겁게 소통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지어 손님들은 잘못 주문된 음식으로 어떤 것이 나올까 하는 기대감마저 갖게 되었고,할머님들은 실수를 해도 두려움보다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식당을 기획한 '오구니 시로'라는 사람은 치매환자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실수를 포용할 줄 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어 식당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비록 잠깐 동안의 이벤트 형태로 개업한 식당이었지만 기획자는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한 것 같습니다.


  작은 실수에도 그것을 포용하지 못해 툭하면 서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멱살부터 잡는 살벌한 요즘.. 우리 동네 어딘가에도 "주문 실수 넘치는 식당"한 곳이 들어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약하고 소외되신 분들에게 따뜻한 시선이 구석구석 머무는 식당,그래서 그 안에서는 누구나 마음껏 행복해도 되는 그런 식당 하나쯤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이 땅의

작은 숨결에서

조그만 싹을 틔워


온누리 가득

차고 넘치는

생명을 키워 내는


우리의 농민이여!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