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17년 8월 6일(가해)

모든 2 2017. 8. 6. 22:30

 

세종 성바오로 성당(공주지구)

본당 설립:2015.8.19/주보성인:교황 바오로 6세 

 

  +  마태 복음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하고 명령하셨다.

 

 

<말씀의 향기>

 

  감춰졌던 신비   -정성용 세례자 요한 순성 주임-

 

 

  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에 함께했던 갈릴레아 촌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설랬을까요?

  다볼산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영광스러운 모습, 베드로는 얼떨결에 외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220여 년 전 조선에 보내어진 유일한 사제.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고자 내포의 면천 양제에 배관겸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신자들은 강당과 사제관을 지었습니다.

  1795년 부활시기 주문모 신부님의 첫 방문이 있었던 이후 신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였을까요?

  하지만, 1798년 10월 밀고자에 의해 신자들은 잡혀가 순교하고 마련된 집은 소실되었습니다.

  어쩌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마련되었을 초가삼간 성전은 이름 없이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솔뫼 방문은 이 땅에 성전 건립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면천읍성 순성 역으로 불리었던 양제 공동체를 이어받아 순성 본당이 탄생했습니다.

 

  기존의 공소를 확장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아 새로운 토지를 매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입 후에 토지를 살펴보니 이곳은 100년 전에(1917년 파티마 성모님이 발현하신 해)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신자들의 덕머리 장터 한켠에 옹기점 터를 마련하고 주일 공소 모임을 한 곳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역사의 터전 위에 새롭게 만들어진 성전 건축은 기적의 연속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티마에서의 성모님 발현, 순성 봉소 공동체 탄생 100주년이 되는 시점에 성전이 마련되기를 바라며 성모님과 이 지역의 순교자들에게 의탁하며 기도하고, 건축을 시작한 지 100일 만에 새 성전 입당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고 능력이 모자랐던 시골 노인 신자들을 신부는 믿을 수가 없었고, 신자들은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신부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손길과 이 지역 순교자들의 전구와 본당 신자들의 기도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멀게만 느껴졌고 다른 곳에서만 찾고자 했던 예수님이 우리 신자들 안에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십자가의 여정을 의심 없이 힘차게 따라 걷고자 합니다.

 

 

  via의 시선(만나야 하는 것)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휴가기간입니다. 더불어 저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럼에도 쉴 수 없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쉼을 마치고 움직이고 있을 때,저의 쉼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해마다 이 시간이 되면 고민합니다.

 

 쉼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좁혀나가는 섵낵으로 채울 지 아니면 가슴 속에 품어야 하는 수많은 성찰을 위한 고독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지 갈등합니다.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찾는 저를 봅니다. 눈과 귀를 자극시켜 줄 그 무엇을 찾습니다. "나의 시, 공간 안에 채워야 하는 것이 지금 내가 채우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가끔 아니 자주 지금 여기에서 찾은 것으로 채우고 난 후 느껴지는 허무와 또 다시 가슴 한가운데 빈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찾는 것과 채워야 하는 것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채우고 싶어 찾은 것은 채워야 하는 것을 드러내는 예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채우고 싶어 찾은 것을 통해서 채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채우고 싶어 찾은 그것이 알려주는 것, 그것은 분명 나의 존재 이유와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창조의 이유, 하느님 창조의 지속을 위한 존재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행위와 존재가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멕카르트는 강론을 통해서 '행위와 존재가 하나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말씀을 낳으시고, 말씀은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말씀에 행위가 없으면 말씀은 소음이 되어 버립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숨겨지고 감춰진 것을 채웁니다. 모든 피조물은 말씀이 행위가 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물질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패조된 사물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흔적을 찾고 소리를 듣습니다.

 

  내 안에 채우고 싶은 그 무엇을 향한 간절한 바람,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그러나 기억합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고 감춰진 하느님의 바램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72)>

 

결혼식은 못했지만 피로연은 성대했다

  결혼식을 코앞에 둔 예비신부가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예비신랑으로부터 결혼취소 통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을 갑자기 가장 절망적인 순간으로 맞이하게 된 신부,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결혼식 후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던 피로연이 큰 문제였습니다.


  예약 취소가 안 돼 미리 지불한 3천400만 원이나 되는 연회 비용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놀라운 결정을 하게 됩니다. 피로연을 노숙자들을 위한 파티로 열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인근 지역 노숙자 쉼터에 연락해 170명의 노숙자들을 선정해 정식 초청장을 발송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연회장에 입고 올 양복과 드레스, 버스 편까지 마련했습니다.


  드디어 예정대로 파티가 열렸고, 그 연회에 참석한 노숙자들은 평생 처음으로 자신들도 누군가에게 초대받을 수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느끼며 마음 따뜻한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웨딩드레스 대신 정장 차림을 하고 환한 미소와 함께 노숙자들을 결혼식 하객처럼 정성껏 맞이한 그녀, 끔찍한 순간이 될 뻔한 순간을 가장 의미 있는 순간으로 바꾼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얼마 전에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사라 커민스'라는 예비 신부의 선택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결혼식도 못하고, 거액의 비용마저 허공에 사라질 그런 순간에 누가 이런 행복 반전의 꿈을 꿀 수 있을까요? 내가 슬플 때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그 슬픔을 치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을 멋진 파티처럼 즐기며 살아갈 비법임을 스물다섯의 그녀에게 배워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어? 저기

시간이 지나갑니다.


이천십칠 년 여름날

다시 만날 수 없는

계절이라 생각하면

이 더위도

참 소중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