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쌍용2동성당(천안서부지구)
본당 설립: 2006.1.10/주보 성인 :성모 마리아
+ 마태 복음 14,22-33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군중이 배불리 먹음 다음,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그 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물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하시자,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이 믿음이 약한 자야,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말씀의 향기>
물의를 일으킨 예수님 -이덕길 알비노 서천서면 주임-
오늘 복음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억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부제품을 받고 새학기에 서울신학교에서 대전신학교(대전가톨릭대학교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후배신학생들과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전학년이 축제준비를 하였습니다. 축제프로그램 중의 하이라이트는 '거리극'이었는데,일곱 개 학년이 학년별로 주제를 가지고 신학교 주위에 거리무대를 마련하고 거리극(성극)을 연출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해 주제는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징(기적)을 각각 학년별로 표현하는 것이었죠. 저희 부제반은 오늘 복음(마태 14,22-33;요한 6,16-21)에서 들은 '물 위를 걷으시다'가 주제였습니다. 벌써 20년이 지난 거리극의 간략한 내용을 더듬어 보면,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이유는 군중을 선동하고 사회를 혼란시킨 죄였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입니다. 재판에서 변호사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지만,검사는 물 위를 걸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면 그 자체로 유죄가 되고,정말로 물 위를 걸었다면 그것이 물의를 일으켜 사회를 혼란시켰기 때문에 유죄라는 억지 주장이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표징(기적)을 제멋대로 해석해 사회에 해를 끼친 유죄로 판결을 내립니다.
이 시대에도 세상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외치면서 사랑의 실천적 삶을 산다고 해도,그래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해도,곧 유명 연예인들의 열애설에 묻혀 실시간 검색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세상을 지배하려는 적대자들은 또 이 악을 비판하면서, 세상의 고통과 상처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떠남기면서,세상의 고통과 상처들을 그리스도에 물의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고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장에 머리를 갸우뚱하거나 시선을 그들이 주장하는 쪽으로 돌리게 되면,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이 두려워 물에 빠지는 베드로 사도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물의 현상들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재를 하느님 빛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이 고통과 상처들을 겪고 사회의 부조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부재나 거짓된 믿음을 선동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부정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로 인해서 신앙인은 '거센 바람'을 맞게 됩니다.
박해받았던 예언자들이나 순교자들도 믿음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거센 바람'을 맞게 되었지만,"주님,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외치면서 오직 주님만을 찾고 바라보며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신 것처럼,세상의 폭풍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주님의 손길이 머물러 있음을 믿으며,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우리도 거센 바람을 이겨나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via의 시선(춤추자,그와 함께)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아니 심판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래서 자주 사람들의 보였던 말과 행동을 분석합니다.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갈등과 아픔을 발생시킨 말과 행위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봅니다. 객관화를 위한 작업이지요.
불쾌함을 느꼈던 나를 봅니다. 그리고 왜 불쾌함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자기 안에 없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찾습니다. 내 몸의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그것(사건),불쾌감을 밖으로 분출시키게 만든 나의 그것을 찾습니다.
탈을 쓰고 있는 나를 봅니다. 웃는 하회탈을 쓰고 괜찮은척 애쓰고 있는 저를 봅니다. 웃프다고 하지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저의 모습이 그런 것 같습니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웃지만 사실 드러납니다. 기뻐서 웃는 얼굴과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웃는 얼굴은 다릅니다. 감정과 몸의 부조화는 행위의 어색함으로 표현되고,존재와 행위 사이에 간격이 발생합니다.
엑카르트는 '자비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엑카르트는 자비는 상호 의존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자비는 베풂이 아니라 상호 의존과 에너지의 공유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생물은 서로 의존되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춤추는 말씀과 함께 춤추는 것이기도 합니다.
심판자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니 오히려 집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떠나보내고 움켜잡았던 의식의 손을 놓습니다. 대신 자비의 바다에서 무자맥질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그 바다 위에 함께 춤추고 있는 그를 볼 수 있게 되겠지요.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73)>
선풍기의 자연풍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루기 힘든 열대야가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선풍기 없이 잠드는 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바람 한 점 없을 때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 특히 '자연풍'이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바람은 몸의 열기를 식혀 주는 소리 없는 자장가나 다름없습니다.
어린 시절 열대야를 보내기 위해 틀어 놓은 선풍기에는 그런 마술 같은 바람이 없었습니다. 그냥 바람세기에 따라 미풍,약풍,강풍 세 종류의 바람만 있었을 뿐이죠. 그런데 그 후로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선풍기에는 '자연풍'이라는 놀라운 바람이 추가되었습니다. 바람세기와 간격이 일정하지 않은 그야말로 자연을 최대한 닮은 바람이었죠.
'자연풍' 스위치를 켜고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저는 아버지의 '부채'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선풍기도 없던 시절,아버지께서는 매일 제 곁에서 밤늦게까지 부채질을 해 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부채 바람은 언제나 '자연풍'모드였습니다. 바람의 강도도 일정하지 않았고,힘이 드시면 간간히 부채질을 멈추기도 하셨기 때문이죠.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아버지의 부채 바람에는 아버지 채취가 묻어난다는 점이었습니다. 부채질하느라 땀을 흘리시면 그 땀냄새가 부채 바람에 실려 제코에 와닿곤 했습니다.
바람이 시원하기만 하다고 해서 잠이 저절로 오는게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때론 멈추기도 약해지기도 하지만,그래도 지속적으로 전해지는 사랑이 우리를 잠잘 수 있게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바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삶을 살아가다 혹시 불면의 밤이 찾아오면,우리 각자에게 불었던 사랑의 '자연풍'을 기억하면서 조금이라도 편한 잠을 청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스치는 바람,나무의 숨
풀잎의 속삭임
물결의 은빛대화
야생화의 하늘거림
달팽이의 느린 걸음
잠자리 날갯짓
나비의 춤...
여기,저기,거기
무릇
나 아닌 것들로 가득한데.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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