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 20주일 2017년 8월 20일(가해)

모든 2 2017. 8. 20. 22:30

배방성당(아산지구)

본당 설립: 2008.1.23/주보 성인:성모 승천

 

 

+ 마태 복음15,21-28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다위의 자손이신 주님,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주님,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말씀의 향기>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박남규 요한보스코 부여 주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방에서 조금 떨어진 티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마귀 들린 딸을 둔 이교인이었던가나안 여인(페니키아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교인인 여인이 유다인인 예수님께 소리를 지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딸이 호되게 마귀에 걸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사랑하는 딸이 아픔을 고스란히 전달되는 장면이다. 자신의 일이었다면 염치나 체면 또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 망설였겠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의 일인지라 더 이상의 머뭇거림도 없이 소리를 지른다.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첫 번째로 시험하신다. 곧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여자를 돌려보내자고 말한다. 그들 뒤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긴 소리의 파장 때문에 남자의 절규보다는 여자의 절규가 더 귀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예수님의 시험이 이어진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며,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대답이 들려온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여인에게서 믿음을 발견하신다. '당신만이 제 딸을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라는 믿음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빵은 매일 먹는 주식이기도 하지만,일부 사람들에게는 손을 씻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란 바로 손을 닦고 식탁 밑으로 버린 빵을 말한다. 그 부스러기로 강아지와 거지는 굶주린 배를 채웠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제자들의 행동이다. 한 여인이 이교도란 이유로 돌려보내자고 한다. 상식적이라면 절규하는 여인에게 '왜 소리를 지르느냐? 우리 스승님께 무엇을 바라느냐?'라고 물어봤어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돌려보내자고 했던 것이다.

 

   교회 문턱이 높아지고 본당 신부에게 다가가기 힘들어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교우가 많은 본당일수록 그 말은 더 힘을 얻는다. 이유를 물어보기 전에,또 그렇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기 전에 돌려보내자고 말하는 제자들의 짧은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적지 않은 것을 묵상하게 한다.

 

 

via의 시선(행하기 위해 쉬다)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잠시 멈추고자 합니다.

사유와 성찰을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용한 곳,한적한 곳에서 바람소리와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갈림길이 보입니다.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선택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중요한 사람"이 되는 길과 "중요한 일"을 하는 길 사이의 선택입니다.

 

영성의 전통 속에서 기도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선택지를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영원한 성령이여

조용히 우리에게 노래하고

우리가 서로를 통해 배우게 하소서.

 

힘과 지혜를 갖고 발걸음을 옮기고

걸어가면서 교훈을 얻게 하소서.

 

모든 것들이 가진 목적을 존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접촉하며

언제나 깊이 생각한 뒤에 말하게 하소서.

 

판단하지 말고 관찰하게 하소서.

세상 어떤 것도 헤치지 않고

세상을 떠날 때 음악과 아름다움을 남기게 하소서.

 

우리가 영원으로 돌아갈 때 하나의 원이 닫히고

더욱 넓은 원을 그리게 하소서.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74)>

 

 

레스페베르,헤젤리흐,티암

 

 

  가끔은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 전 휴대폰에 이상이 생겨 수리하러 간 날도 그랬습니다.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긴 대기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매장에 비치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죠.무심히 펼친 페이지에는 '레스페베르''헤젤리흐''티암'이라는 낯선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모두 외국어였는데 한국말로 쉽게 번역될 수 없는 단어들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해당 한국말이 없어서가 아니라,한 단어로 설명하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어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레스페베르'는 스웨덴어인데 '여행이 시작되기 전 긴장과 기대감으로 두근대는 심장 소리'라는 뜻입니다. 가령,여행을 가기 위해 탄 비행기가 출발할 때 심장에서 나는 소리가 바로'레스페베르'인 샘인 거죠.

  '헤젤리흐'는 네델란드어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따스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바라볼 때 서로 느끼게 되는 그런 온기가 바로'헤젤리흐'이겠지요?

 

  페르시아어인 '티암'은 '누군가를 처음 만난 순간 반짝이는 눈빛'이란 뜻인데, 제 앞 대기석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연인을 보니 그들의 '티암'은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게 됩니다.

 

   요즘 단어를 줄여서 말하고,똑같은 말이라도 강하고 자극적으로 말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말이 변하니 말뿐 아니라 사람들 마음까지 점점 삭막하고 거칠어지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뜻도 알 수 없는 신조어를 배우며 살아가기보다,도저히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멋진 순간의 느낌을 담은 이국적 단어들을 배우며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주님을 처음 본 순간의 그 '티암'으로 이웃들과 진정한 '헤젤리흐'를 느끼며 사는 그런 삶을 살아 보고 싶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교수-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설령

내가 아니어도

믿음이면

그만인 것을.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