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22주일 2017년 9월 3일(가해)

모든 2 2017. 9. 3. 22:30

관저1동성당(대전남부지구)

본당설립:2011.1.12/주보 성인:자비의 하느님

 

+ 마태 복음 16,21-2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예수님의 참된 제자 -강승수 요셉 안면도 주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인데,그리하려면 '나 자신을 버리고'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나의 가치관,세계관보다 복음의 정신을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되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그대로 갖고 있고 내 가치관은 먼저 내세우면서 성당에 나온다는 것은 아직 예수님을 내 주님,구세주,하느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신앙생활이 취미생활 정도에서 벗어나 나의 믿음을 이웃들에게 전하기까지 하는 참된 옛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맙소사,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구절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다..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라고 하시며 베드로에게는 커다란 영예가 되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오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십니다.

 

    왜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에 대해서 거부하고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고통받는 것,죽는 것은 싫은 일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 중에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 큰 고통을 겪고 곧 죽는다.'라고 하는데 거부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차원의 삶을 넘어서 살아보고자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입니다. 예수님께 혼날 일입니다.

 

 

via의 시선(행하기 위해 쉬다)  -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길을 걸으면서 길을 만났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그런데 그 길의 끝 자락에서 이미 보았던 길을 만납니다. 익숙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한가지,가지 않아서입니다. 길 위에 차를 세우고 잠시 걷습니다. 논과 밭 그리고 소류지,눈을 감고 잠시 허수아비가 되어 봅니다.

 

   지나가는 바람이 몸의 열기를 식혀줍니다. 쩌르렁 울리는 존재의 외침, 매미라는 녀석의 목이 쉴 것 같아 걱정입니다. 소류지 물살 위로 곡예를 하는 붕어와 잠자리의 날개깃,생명을 지닌 존재는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잠시 그들의 자리에 끼어듭니다. 그러나 소리없이 그리고 최대한 동작을 작게합니다. 그곳에서 저는 "객"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없이 길을 가다보니 목적을 찾게 됩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성찰의 주제가 떠오릅니다. 서두르지 않으니 편하게 길을 찾게 되고,시간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게 됩니다.

 

   배웠던 그리고 수련했던 성실함과 충실함을 떠나보내고 그 자리에 "이유"를 채웁니다. 가고자하는 갈을 지나칠 때 말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 길로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길에서 마주한 경험의 질과 깊이는, 길을 지나침으로 얻게된 상실을 충분히 채워줍니다.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입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선택입니다. 충분히 아름다움에도 아름다운 대상을 보지 않으려고 선택하면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원으로 규정된 존재들의 나열로 세워진 무수한 집들을 발견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름다운 장소에 서 있는 수 많은 펜션과 음식점,잠시의 "쉼"을 위한 장소로 만들어진 집들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속에서의 쉼이 "개인과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아름다운 그곳이 인간의 욕심을 위한 파괴의 장소로 추락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늦은 저녁,별을 찾고 있습니다. 편안한 육신이 되어갈 수록 별을 찾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충분히 아름다운 세상을 느끼기도 어려워지겠지요. 충분히 아름다운 "지금"을 누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찾고,성찰합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76)>

  

  용건보다 매너가 먼저다

 

 

어느날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한번 만나자는 전화였는데 통화가 대뜸 이렇게 시작됩니다.

 

"다음주 수요일 뭐해?"

 

갑자기 다음 주 수요일 일정을 물으니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는 거 같은데.."

"그럼 저녁에 시간 나겠네?"

"그런데 어떤 일로?"

"아,뭐 좀 부탁하려고.."

 

부탁 받는 일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부탁하는 방법이 명쾌하지 못해 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이 한동안 찜찜했습니다.

며칠 후 다른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역시 얼굴 한번 보자는 전화였는데 이번엔 통화 시작이 지난번 걸려 왔던 전화와 매우 달랐습니다.

 

"내일 모레 저녁 같이하며 아이에 대해서

조언을 좀 얻으려고 하는데 시간 가능해?"

 

사실 그날 일이 있긴 했지만 흔쾌히 약속을 잡았습니다. 처음부터 무엇 때문에 만나고자 하는지 투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여 주는 상대방의 매너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사람을 만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내가 먼저 문을 활짝 열고 상대방을 기다리는 매너가 그 만남을 진실하게 만드는 최우선의 조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를 먼저 드러내 보이는 투명함으로 9월에는 좋은 분들과 행복한 만남을 자주 가질 수 있는 약속을 많이 잡아 보시길 바랍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고백

 

내 영혼의 질량

삶의 무게와는 달리

바람보다 먼저

날아가고

먼지보다 늦게

내려앉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벼움

만큼이라도

사랑하겠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