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21주일 2017년 8월 27일(가해)

모든 2 2017. 8. 27. 23:00

 

유구성당(공주지구)

본당 설립:1968.12.28/주보 성인:노동자의 요셉

 

  +  마태 복음16,13-20

 

  <불행하여라,저희 눈먼 인도자들아!>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재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근본적인 질문  -강전용 마태오 산성동 주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시지만,언제 어디서나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이 질문은 결코 남의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우리에게 단지 그분의 신비로운 정체성에 대해서 대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해서,아니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못한 예비자들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분," "예수님은 성탄절에 태어나신 분","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아버지는 요셉","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

 

  첫영성체를 하게 되는 아이들이 대답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리스도","하느님의 아들","구세주","천주의 어린양"..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대답은 "예수님은 가장 좋은 친구"였습니다.

 

  신자들로부터는 이런 답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 "예수님은 우리 가족의 수호자","예수님은 나를 되살려 주시는 분","예수님은 자비로우신 분","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예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예수님은 나의 목자", "예수님은 나의 도움,나의 방패, 나의 구원자"..

 

  우리 신앙의 여정은 어쩌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이가 청소년으로,다시 성인으로 성장하듯,우리의 신앙도 기도와 묵상,공동체 전례의 참여와 활동,그리고 사랑의 나눔과 봉사를 통해 조금씩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숙해져 가고 신앙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더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신앙의 여정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어둠의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두 다리의 힘을 잃고 멈추어 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시고,용기와 힘을 주시고 마지막까지 우리의 여정에 함께해 주심을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여정은 어렵고 힘들지만 기쁘고 행복한 주님과의 모험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우리의 신앙 여정 안에서 나의 믿음과 나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다시 나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75)>

 

이만큼,하늘만큼...

 

 

 

 

  지난 시절이 어떠했는지 어쭤보니 이런 답변이 돌아옵니다.    "행복했습니다. 이만큼,하늘만큼.."


  소록도에서 43년을 머물다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다시 소록도를 찾은 '마리안느'수녀님의 텔레비전 인터뷰 장면입니다.


  스무 살을 막 넘긴 어린 나이에 소록도를 찾아온 '마리안느'수녀님과 '마가렛'수녀님... 이 두 분께서 행하신 아름다운 선행은 많은 분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삶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었던 '반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그냥 편지 한 통만 남기고 훌쩍 소록도를 떠나셨던 일이 그것입니다.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제대로 일할 수 없고,있는 곳에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베풀기는 손톱만큼 베풀면서 생색은 손바닥만큼 내려하고,누군가를 돕고 나서 적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 애쓰는 제 자신의 모습이 떠 올라 한없이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셨으면서도 부담은 그 어떤 작은 것이라도 주지 않으려는 마음,그만큼 베풀었으면 작은 보답이라도 받아 마땅하지만 그것마저도 받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참 행복의 근원을 깨닫습니다.


  행복이 "이만큼,하늘만큼"이라고 팔 벌려 이야기 할 수 있기를 오늘부터라도 꿈꿔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풀꽃의 노래 -이해인-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