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흥동성당(대전북부지구)
본당 설립:2011.1.12/주보 성인:예수 성심
+ 마태 복음,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질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년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형제를 얻은 것이다 -한영승 세례자요한 둔포 주임-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라는 말은 예언자인 에제키엘이 파수꾼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가 자신의 판단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흔히 나만 잘 살면 되지 남의 삶에 참견하지 않는 경우도 볼 수가 있는데,하느님께서는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라면 당연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느 부모도 자녀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자녀들 중 누구라도 조금 나은 사람이 아직 부족한 형제나 자매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하도록 부모는 바라고 있고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들은 자신의 나은 위치를 더 이상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을 부모만큼 기다려 주지도 배려하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마음처럼은 아니더라도 이 의무에 관해서 파수꾼처럼 당신의 말씀을 전달해 주기를 바라는 구약에서의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구약에서는 예언자의 의무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복음에서는 그로 인한 결과까지도 하느님과 나누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을 교육할 때 '이것을 안 하면 혼난다'와 '이것을 하면 이렇게 좋은 것이 생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1독서의 느낌과 복음의 느낌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 누구의 버려짐도 죽음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라서 가끔씩은 손 놓고 싶을 때도 있고, 너무 많은 일 때문에 주변에 관하여 무관심해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경고를 혹은 관심을 받지 못할 형제들이 쓸쓸히 혹은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그에게 악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들으신 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악한 이들이 그들의 길을 버리게 하거나,말씀을 듣고 다시 돌아와 형제로 남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via의 시선(거부합니다.)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적의"(敵意)의 사전적 정의는 적대시 하는 마음,해를 가하려는 마음입니다. 적의를 품고 있는 화를 다스릴 수 없어서 화가 자신을 삼켜버리도록 허락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분노는 분개하여 몹시 성을 내는 것을 의미하고 분개는 몹시 분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즉 몹시 분하게 여겨서 성을 내고 있는 상태가 분노입니다. 몹시 분하게 여긴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그 어떤 것이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분노의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성을 내는 만큼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래서 저는 화를 내는 사람 안에서 무릎 속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람을 만납니다. 성을 내는 이유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돌출하는 분노를 마주하기는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더구나 적의(翟衣)를 입은 사람이 적의를 품고 있을 때 느끼는 참담함은 더욱 큽니다.
적의(翟衣)를 입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주는 적의(敵意)는 그들이 입고 있는 적의(翟衣)가 합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언제나 옳은 사람,자신의 말이 항상 진리인 사람,그래서 어제의 나의 말과 오늘의 말이 달라도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적의(翟衣)는 그가 누리고 있는 힘을 드러내는 힘의 상징일 뿐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정들의 종합입니다. 어릴 때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제 행위에 대한 성찰로 내게서 발(發)해지는 것입니다. 피해를 당한 타인이 느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행위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입니다. 존재의 본질에 어그당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수오지심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서 수치심(羞恥心)을 느껴야 하는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가난한 사람,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부끄러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돈과 권력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믿음이 수치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아이들의 밥상을 불량하게 채우고,이유없이 타인을 폭행해도,세금으로 주머니를 채워도,법으로 법을 어겨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수치심(羞恥心)이 부재한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심화됩니다. 이른바 갑질의 폭력은 일상화되고,일상화된 폭력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폭행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일상 속에서 형성된 폭력의 사다리를 참고 살아야 하는 사회,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살피고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외침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77)>
가족이니까 천천히
얼마 전 점심을 먹다가 한 동료의 푸념을 들었습니다. 아내에게 최신 컴퓨터 프로그램 사용법을 알려 주다가 하마터면 부부싸움을 크게 할 뻔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자 그 푸념을 듣고 있던 다른 동료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합니다. 아들에게 새로 나온 휴대폰 앱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배우는 동안 여러 번 핀잔을 들어 서러웠다는 겁니다.
역시 가족끼리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쪽으로 이야기 결론이 맺어질무렵 말없이 앉아 있던 한 친구가 이렇게 불쑥 한마디합니다.
"나는 오히려 가족이 더 편하던데.."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그 친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어쩌다 만나는 게 아니라,매일 보는데굳이 잘 모른다고 조바심 낼 필요가 뭐 있어?"
가족은 가깝다 보니 기대감도 높아지고,그 기대만큼 결과가 안 나오면 또 그만큼 짜증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그런데 그 친구는 역으로 가깝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는 거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친구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일 보는 사이라면 굳이 한 번에 모든 걸 완성해야 할 강박관념이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요?
주님은 우리가 한 번에 주님의 가르침을 못 알아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결코 다정한 시선을 거둬 가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가까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한 번에 주님의 가르침을 못 알아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결코 다정한 시선을 거둬 가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가까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가족보다 가까운 관계도 없습니다. 가까운 만큼 더 여유롭게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서로 가르치고 배운다면 평생 동안 기쁘게 성장하는 축복 안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구름은
천천히
가자하는데
바람이
앞서가는구나.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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