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동성당(대전중부지구)
본당 설립: 1981.9.1/주보 성인:한국 103위 순교성인
+ 마태 복음 20,1-16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정당한 삯을 주겠소.'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하고 물으니,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러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말씀의 향기>
배고픈 사람이 먼저 -김정한 세례자요한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아침부터 저녁까지 각각 다른 시간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는 이야기. 그것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는 아리송한 이야기. 오늘의 말씀은 어떤 처지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해가 되기도 하고,그렇지 않기도 하다.
오늘 말씀을 그대로 실현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인천에 있는 무료 급식소인 '민들레 국수집'이다. 그곳에는 줄을 서지 않는단다. 혹시 줄을 서게 되면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들여보내기 때문이다. 그곳의 줄은 먼저 오고 나중에 온 순서에 의해서 정해지지 않고 가장 배고픈 사람이 맨 먼저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배고품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자신이 먼저 왔어도 주변을 서성이다가 더 배고픈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한다고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매일,매 순간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질서는 중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하찮아 보이는 질서라도 오랜 세월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형성된 것이기에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질서라는 맹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나는 그런 허점을 가끔 장항선 기차를 탈 때 보곤 한다.
서울에서 충남 장항을 거처 군산으로 이어지는 장항선은 농촌지역을 경유하는 노선이어서 노인분들이 많이 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 많은 분들이 서서 가는 경우가 하다하다. 왜 그럴까? 너무나 잘 짜여진 질서가 한몫을 한다.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으로,나아가 스마트폰으로 너무도 쉽게 잘 짜여진 순서에 따라 표를 예약한다. 하지만 그런 기기에 익숙하지 못한 노인분들은 아무리 역까지 빨리 가도 좌석표가 없으니 입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제일 어린 요셉을 택하셔서 그 집안을 구원으로 이끄셨다. 성왕으로 칭송받는 다윗 역시 형제들 중에서 막내였고,이런 하느님의 속성을 잘 아시기에 성모님은 마니피갓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일컬어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분이라고 노래하셨다.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때로는 세상의 질서와 다르게 느껴져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아침 일찍 온 일꾼처럼 항의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옳다고 여기는 질서가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질서 안에 하느님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된다.
via의 시선(오래,천천히 보자)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글-
잠을 자기 전,창문을 조금 열어놓습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방을 채우면 잠을 청합니다. 늦 여름의 모기들의 먹이사냥에 붉은 반점이 생겨도 잘 이겨냅니다. 지난 한창의 여름 때 보여줬던 날개짓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그래서 손을 뻗으면 쉽게 잡힙니다. 본성으로 움직이는 존재여서 그렇겠지요. 그래서 찬 바람을 방에 채우면 날개짓을 멈추고 쉴 것 같아서 창문을 열고 바람을 채웁니다.
자주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자동차로 이동하면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해서 걷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가장 좋은 이동수단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사용하면 할 수록 더욱 더 튼튼해지는 이동수단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건강함을 유지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러고보면 이 도구는 존재의 통합을 위한 선물이 분명합니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이동수단에 의지해서 몇백키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차를 이용하면 몇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중요한 지점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감동하고 기도하면서 기념촬영을 하면 됩니다. 다른 볼거리와 들을거리를 할 수 있는 시간과 힘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20-30키로를 걸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채울수 없습니다. 몸이 힘들면 가장 중요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들이 걸으면서 만나는 기쁨이 매우 크고 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길 위에서 거울에 비춰진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새겨진 나,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나를 발견하고,삶의 여정 속에서 나와 함께 나를 새기고 계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내면 안에 감춰져 있던 기쁨의 샘에서 경탄과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삼보일배를 하면서 느꼈던 작은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기억합니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야만 그리고 천천히 가야만 보이는 작은 존재들의 아름다움, 나 자신도 천천히 보고 오래 보아야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알게 됩니다.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나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오늘 행복하소서.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79)>
발까지 차오르니 행복하다
제가 존경하는 어르신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분께서 제게 흥미로운 문제를 하나 내주셨습니다.
"혹시 '만족'이라는 말을 한자로 쓰면 왜 '滿足'인 줄 아세요?"
"글쎄요..."
사실 저는 '만족'의 한자 의미를 모르고 있던 건 아닙니다. '滿'의 뜻을 풀이하면 '차오르다' 혹은 '가득하다'이고 '足'은 누구나 알고 있듯 '발'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만족이라는 말에 굳이 '발'이라는 뜻의 한자'足'이 들어가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왜 하필 '발'이죠?"
그분께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발까지 차올랐을 때 거기서 멈추는 것이 바로 완벽한 행복이라는 뜻은 아닐까요?"
가끔 한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짧은 한 단어 안에서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만족이라는 한자를 보면서 행복은 욕심을 최소화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으신 겁니다.
그러고 보니 따뜻한 물이 발목까지만 차올라도 온몸이 나른해지고,발만 시원해져도 온몸의 땀구멍으로 열기가 빠져 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지금껏 종종 목까지 차오르고,머리끝까지 채워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욕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발까지 차오를 때 웃을 수 있는 지혜로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고 싶어집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문득
서 있는데
어제의 그 자리
다시
내딛는 발길
오늘의 이 길
그 언젠가도
그랬듯이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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