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성프란치스코성당(공주지구)
본당 설립: 2014.1.15/주보 성인: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 마태 복음.21,33~43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저자가 상속자다. 자,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소작인,새로운 소작인 -김홍식 시몬 관평동 주임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을 보면 주인공은 포도밭 임자입니다. 이 사람은 가진 것이 넉넉해서인지 포도원을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애써 만들어 놓은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포도 철이 되자 이제 포도를 거두어 들일 때가 되었으니 당연히 약속한 대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일을 맡아서 잘 할 수 있을 만한 종들을 보냈겠지요.
그런데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오히려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종들을 더 많이 보내어도 똘똘 뭉친 소작인들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들까지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이 하는 짓을 보아서는 아들을 보내지 말아야 했는데도 주인은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준 것이지요. 그러나 아들을 보냈다고 해서 이미 굳어어져버린 소작인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문제를 더 키우고 말았습니다. 이 아들만 없애면 이 땅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화가 날 대로 난 주인은 소작인들의 반란을 누르고 다른 이들에게 맡깁니다. 물론 반란을 일으킨 소작인들은 모두 죽었겠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우리는 소작인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무엇때문에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맡기셨는지를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그분이심을,우리가 아니라 그분이심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포도원을 맡았던 나쁜 소작인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우리들을 부르셨지만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자신의 뜻만 앞세워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고,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기보다 오히려 악표양을 보인다면 우리야말로 악한 소작인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라고 보내신 또 다른 종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증거하다 보면 때론 불이익을 받아야할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힘겨울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포도원을 맡게 된 새로운 소작인들일 수 있습니다. 앞서 맡았던 소작인들이 잘했더라면 우리에겐 기회조차도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주신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우선 하느님 뜻에 맞갖게,그분 보시기에 흡족하게 농사를 잘 지어야 합니다.농사는 당연히 이 세상살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되어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는 많고 적음보다 우리의 준비되어 있는 마음,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진짜 주인임을 고백하며 바치는 봉헌이 더 소중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요? 못된 소작인일까요? 아니면 그분 마음에 드는 종일까요?
via의 시선(내가 할 수 있는 것)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익숙해지지 않는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선택의 과정 안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지만 시간이 흐름 속에서 가슴 한 구석으로부터 밀려오는 그리움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늦은 저녁이 되면 허기를 느끼는 저를 봅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서 먹을 것이 있는지 살핍니다.
눈에 들어온 먹거리를 챙겨들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바쁜 손놀림과 구강 운동으로 뇌가 느끼는 허기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찾아오는 허전함,먹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다짐이 무너집니다.
사제관 앞 편의점 광고판에 불이 켜집니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그리고 더 많은 재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밤을 밝히는 표지판은 역설적으로 저녁이 되어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어 줍니다. 창가로 보이는 먹거리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많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것들이,밤이 되니 더 잘 보입니다.
때론 저 많은 먹거리가 최면제 혹은 마취제처럼 느껴집니다. 먹고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의 단절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때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먹고,선택을 피하기 위해서 마십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느낍니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욕구입니다.
생각합니다. "허기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찾습니다. " 단순한 배고픔이 아닙니다. 육체의 허기를 촉발시키는 방아쇠는 채워지지 않은 채 존재하는 내면의 공허입니다. 이 공허가 존재의 외로움을 불러오고,보이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외로움이 정신의 빈궁과 몸의 포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최대한 버티고 선택하며 사는 것,제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81)>
동그라미 그리려다 그린 얼굴
바쁜 하루를 살다 보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쉽게 잊곤 합니다. 그럴 때 유일하게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가 바로 거울입니다.
엘리베이터에 홀로 타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아마도 엘리베이터 안에 부착된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일 겁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을 때도 손보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눈길이 가고,거리를 걷다 보면 쇼윈도우 안의 물건보다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에 더 시선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울보다 손쉬운 도구가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휴대폰입니다. 휴대폰 덕에 이제 더 이상 엘리베이터 안이나,세면대 앞,혹은 쇼윈도우를 통해 자신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시시각각으로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길을 걷다가도,횡단보도 앞에서도,밥을 먹는 도중에도,버스를 타고 가면서도,심지어 산꼭대기에 올라 가서도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자신을 촬영합니다. 한순간 한순간,언제 어느 곳이라도 내 자신이 없는 곳은 이제 없습니다.
내가 나를 촬영하고, 내 모습을 원하는 대로 바꾸고,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에 분주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때때로 진짜 내가 자신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공허해지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문득 옛 노래의 가사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내 얼굴이 아니라,그리움으로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로 풍성해지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햇볕이 탱글탱글
여물어 갈 때면
바람 한 점에도
고향이 묻어와
아련한 마음의
그 무엇이
종일
그렇게 울렁입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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