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동성당(대전서부지구)
본당 설립:1994.8.1, 주보 성인:한국 103위 순교성인
+ 루카 복음 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말씀의 향기>
거처에 머무는 사람 -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갈마동 주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사제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처로 돌아옵니다. 사제관 문을 열다가 잠시 멈칫하는 저를 바라봅니다. 제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명패,그리고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기억합니다. "아! 나는 잠시 이곳을 거처가는 객(客)이지!"
성(姓)이 '사',이름(名)이 '제관'인 집. 그럼에도 감사를 드리는 것은 하루의 피곤함을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그 공간을 원하는 때에 그리고 내키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합니다. 집이 아닌 거처입니다.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입니다.
잠시 머무는 공간 안에서 거처를 정하는 사람은 언제든 거처를 떠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은 없습니다. 오늘을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거처에 도착하면서,동시에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불안정의 상태 속에서 만들어야 하는 안정감은 언제나 도전으로 다가오는 숙제입니다. 저는 '버티기'를 통해서 숙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살다 보면 정이 듭니다. 허공에 복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관계 안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관계 안에서 산다는 것의 전제는 사람 사이의 맺고 풂이 있다는 것입니다. 맺음의 기쁨과 환희,그리고 풂 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집이 없다는 것은 떠나야 하는 운명을 잉태한 상태를 의미하기에,언제나 풂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일정한 경계선을 설정하고 살아야 하는 나그네,파견된 자의 삶의 상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 위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고난을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내가 고백하는 것이 신앙일까? 대형화와 대형화를 달성하기위한 효율성의 유혹과 손잡고 싶어 하는 나는.. 정상일까? 효율성의 유혹과 손잡고 얻은 결과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나그네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떠남이 아닌 매임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순교 성인들께 큰절을 드리며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말씀을 반추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via의 시선(오늘!)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삽니다. 이른 아침,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하루,일정표에 따라 움직이는 저를 봅니다. 매일 다른 하루를 삽니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시작되는 하루, 일정표 속에서 경험되는 만남 속에서 체감되는 다른 느낌이 어제와 다른 오늘을 확인시켜줍니다. 저는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살면서 다른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살 수 있는 이유는,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이 시작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미 적응된 오늘과 새롭게 경험되는 오늘이 지금 여기에서 교차되고 있습니다. 새롭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제의 경험으로부터 조금 다른 경험이 가능한 오늘이 새로운 '지금 여기'입니다.
습관의 사전적 정의는 '버릇'입니다. 습관을 몸에 새겨진 몸짓으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몸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습관은 몸의 상태와 더불어 마음의 상태를 알려주는 표지가 됩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몸은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책장 속에 감춰져 있던 사진 속의 맑고 부드러웠던 나를 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재된 아픔에 짓눌려 있는 나로 살았습니다. 힘들었을 나에게 애도를 표하고 안아줍니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진지한 상태의 나로 살았습니다.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나,그러나 새로운 오늘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잃어버린 나,사실 그때의 나는 '아픈 나'였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힘이 필요했습니다. 어릴 적 시작된 투쟁입니다. 이제 투쟁을 그만 하려고 합니다. 투쟁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유를 위한 초대에 귀를 기울입니다. 힘을 뺀 몸으로 주어진 오늘을 살아갑니다. 어제와 같은 그러나 어제와 다른 오늘을 희망하면서...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78)>
다시 보고 싶은 사람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남수단 공화국'의 15세 이하 청소년들이 얼마 전 전남 담양군을 찾았습니다. 월산면에 위치한 천주교 공원묘지에 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영덕에서 열린 국제 'U-15'축구 대회에 선수로 참석했다가,시합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던 그들이 왜 하필 공원묘지에 들렀을까요?
한국을 떠나기 전에 꼭 만나 뵈어야 할 분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는 '고 이태석'신부님이셨습니다.
남수단 공화국에서 의료와 교육봉사를 몸소 실천하셨던 그분의 묘소를 찾은 소년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분이 누워 계신 곳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떤 인사를 건넸을까요?
자신들과 함께 노래하고,함께 울고 웃고 했던 그 낮선 이방인이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이 느껴졌던 그 순간을 그 아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추억했을까요?
다시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들에겐 재촉하기보다 기다려 주는 친절함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오만함이 아니라,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마음이 그들을 미소천사로 만듭니다.
또한 그들은 사랑을 멈춰서서 말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움직이며 몸으로 실천할 뿐입니다. 노래를 가르치면 같이 노래하고,집을 지으면 함께 벽돌을 나르며,아픈 사람을 도울 때에는 함께 아파합니다.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 마음에 고향 하나를 갖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남수단 공화국 소년들은 어쩌면 이국땅이 아니라,마음의 고향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추석이 다가오는데 우리 마음은 어떤 사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일까 궁금해집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이 계절에는
남의 모자람보다
내 부족함을
먼저 들여다보고
이웃의 흠집보다는
아름다운 마음을
먼저 읽게 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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