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성당(대전동구지구)
본당설립:1971.7.13/주보성인:성가정
+ 요한 복음. 4,5-42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서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선생님,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 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한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내 말을 믿어라,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 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하고 묻지 않았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고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잡수십시오."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하시자,제자들은 서로"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그분의 일을 완수한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너희가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via의 시선(내일을 위한 선물)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갑자기 찾아온 통증을 느낍니다.이른 아침,몸이 보내는 신호에 잠이 깼습니다. 오른 쪽 발이 퉁퉁 부어있습니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지금 경험하는 몸의 상태는 지난 시간동안의 선택에 대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는 지금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 나의 선택을 돌아보는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는 것을 보니,제가 살아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가끔 편안함을 밀쳐내고 찾아오는 몸의 신호를 반갑게 맞이하게 됩니다. 고통을 느끼게 되면 고통을 느끼는 나에게 더많은 집중을 하게 됩니다. 고통은 피해야 하는 악이지만 나를 인식하게 만드는 훌륭한 자원이기도 합니다.
눈을 감고 침묵합니다. 통증이 있는 부분에 집중합니다. 손으로 감싸 안고 부드럽게 보듬어 줍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지경을 만든 나의 지난 선택에 대해서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면 통증이 조금 가라앉습니다. 통증을 의식하는 순간 통증이 조금씩 작아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통증을 통해서 각성되는 자신에 대한 인식..삶의 방식에 대한 수정을 결심하게 됩니다.
무모한 자유와 변덕스러운 행위는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분 짓는 특성입니다. 인간은 다짐을 하다가도 까맣게 잊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모양을 바꾸어 냅니다. 한계성 속에서 추구하는 지속적인 변화의 욕구는 인간 본질의 근본적 특성입니다.
인간은 오늘의 나를 통해서 내일의 나를 미리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런 삶을 선취라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미래의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선취하는 것,즉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지금의 나를 인식함으로써 미래의 나를 지금 여기에서 구현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고통을 감사드립니다. 내일의 선취를 위해서 주어진 자원이 나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52)>
축복된 거부반응
최근 일본의 한 연구실에서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실험 과정은 이랬습니다.
개 한 마리 앞에 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가운데 앉은 사람이 개 주인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개 주인은 장난감이 담긴 통을 들고 있는데,그 통의 뚜껑을 열기 위해 낑낑대고 있습니다. 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뚜껑이 잘 열리지 않자 개 주인은 양쪽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한 쪽 사람은 기꺼이 도움을 주고,다른 한 쪽 사람은 냉정하게 주인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조금 후 양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개에게 동시에 먹이를 내밀자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개는 자신의 주인에게 도움을 안 준 사람의 먹이를 외면하고,도움을 준 사람의 먹이를 선택한 것입니다.
다른 개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 동일한 실험을 반복 했음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개뿐만 아니라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유사한 실험들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는 본능적으로 이기적 존재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다는 사실이 이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들로부터 세상을 지켜 온 것은 어쩌면 바로 우리의 그 본능적 거부반응 때문은 아닐까요?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즉각적 거부는 하느님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신 비밀병기인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옳고 그름을 묻고 따지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불편함'의 본능이 깨어나는 일입니다. 늘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쩌면 생각이 아니라,선을 향한 우리들의 원초적 본능에 대한 주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충무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어!
나비다
말씀이
환한 날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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