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사순 제5주일 2017년 4월 2일(가해)

모든 2 2017. 4. 2. 14:08

 

문화동성당(대전중부지구)

본당 설립:2007.1.24/주보성인:성가정

  

   요한 복음. 11,1-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때에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그의 언니 마르타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주님,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다시 유다로 가자,"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스승님,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주님,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하고 물으시니,그들이 '주님,와서 보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하시니,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via의 시선(소리를 보다)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늦은 밤,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촛불을 켭니다. 파라핀을 넣은 용기에 고정된 심지에 불을 댕기면 어둡던 거실이 제법 환해집니다. 늦은 밤,촛불은 밝음과 어둠을 잘 드러냅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면서 빛의 크기를 재어봅니다. 얼마만큼 가면 촛불이 희미해지는지,지금 이 순간 가장 밝은 곳과 가장 어두운 곳은 어디인지 살펴봅니다.

 

  거실 어디든지 촛불은 잘 보입니다. 그렇다면 거실이 운동장만큼 넓다면 어떨까? 저멀리 빛은 보이겠지만 빛이 비추는 사물은 볼 수 없겠지요.그러나 빛이 있다는 것은 알수 있습니다. 작은(?)거실에서 바라보는 촛불은 거실에 놓여진 사물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둠 속에 있던 거실 안에 있는 사물들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초불 때문일까 아니면 어둠때문일까?

 

  한낮의 시간,다시 촛불을 댕깁니다. 그리 밝지 않게 느껴집니다. 빛이 있으니 다른 빛이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촛불을 끕니다. 빛을 밝히는 이유는 어둠이 있어서입니다. 어둠이 없다면 빛을 밝힐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둠이 없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어둠이 없는 상태는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어둠이 없으신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이외의 모든 피조물 특히 사람은 어둠을 존재의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존재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처의 치유는 발생한 상처의 직면을 통해서만 가능하고,상처는 언제나 -비록 치유된 상처일지라도-그 흔적을 남깁니다. 교회는 그 흔적을 "복된 탓"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노래합니다. "오! 복된 탓,너의 죄로써 우리가 구세주를 뵙게 되었도다." 교회는 임마누엘하느님의 축복의 시작인 아담의 죄를 감탄의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아담의 죄를 단죄하지 않습니다. 그의 어둠으로 시작된 빛의 역사를 감탄의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빛이 없다는 것은 빛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밝히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둠을 직시하는 사람만이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역설입니다. 어둠을 통해서 빛을 봅니다. 그래서 오늘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살아갑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54)>

  

꽃무늬 벽지 고르는 법

 

 

딸아이 방을 새롭게 꾸며 주기 위해 엄마는 딸과 함께 벽지가게에 들렀습니다. 한참을 돌아본 후 엄마가 딸에게 물어봅니다.


엄마: 마음에 드는 거 있니? 딸 : 저기 저 벽지가 좋아.


딸아이가 손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활짝 핀 꽃무늬 벽지가 그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딸 : 엄마는 어떤 게 좋아? 엄마: 글쎄,엄마는 여기 이게 마음에 드는데?


엄마가 고른 벽지도 꽃무늬 벽지였는데 활짝 핀 꽃이 아니라,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고른 벽지에 비하면 훨씬 소박해 보이는 것이었죠. 엄마는 딸아이에게 왜 그런 벽지를 골랐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이미 활짝 핀 꽃무늬 벽지를 보는 것보다,이제 막 피려고 하는 꽃봉오리 무늬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게 더 즐겁지 않을까? 언젠가 활짝 꽃피게 될 그 순간을 상상하는 기쁨과 희망이 있을 테니까."


오래전에 봤던 영화 "투씨"의 한 장면을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벽지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삶에 대한 지혜를 담으려 했던 엄마의 마음이 감동으로 남았던 장면입니다.


4월이 시작됩니다. 여기저기서 화사한 꽃들이 그 자태를 뽐내게 될 시간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꽃은 생각보다 활짝 핀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아쉽게 그 아름다움은 봄바람을 따라 허공으로 사라지게 될 겁니다.


꽃보다 오래 남는 것은 희망을 가졌던 기억들입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꽃송이로 변해 가는 그 순간을 기다렸던 기억들 말입니다.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꿈을 꿀 수 있다는 것,그것이 꽃보다 아름다운 순간임을 잊지 않는 4월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깨어나라시면

침침하고 습한

나락에서

투명한 바람으로

깨어나겠습니다.


늘 함께

사랑하는마음으로

다시 살겠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교구 시노드 "우리 함께 걸어요!"

천주교 대전교구 시노드 사무국

http://synod.djcatholic.or.kr

 

 

 

  교구 시노드 (synod)란? "함께 길을 걷는다"(Syn+hodos)는 뜻을 지니며, 교구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교구장 주교가 교구 구성원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개최하는 '대의원 회의'를 말합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현재를 진단하고, 해결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며, 이에 따른 교구의 사목 계획이 수립되게 됩니다.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 소식

교구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별 회의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이번 주에는 9개 분과 중에서 신심활동 분과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신심 활동 분과  * 3/9(목) 12차 회의 /장소 :정하성 교육회관

분과는 '대전교구 순교신앙의 역사'에 대한 강의와 '새로운 복음화의 길'에 대한 발표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새로운 복음화의 길에 대한 주제발표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서는 먼저 시대의 징표를 해석할 줄 아는 밝은 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요약입니다.

 

*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현대적 고찰

오늘날 교회가 너무 많은 것들을 교우들에게 요구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신앙을 좀 더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새로운 복음화의 필요성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과 신심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복음의 보편적 가치는 언제든지 상대화된다.

 

* 교회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복음화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는 그릇된 생활양식을 낳는다. 우리시대의 전형적인 실천적 상대주의는 교리적 상대주의보다 훨씬 위험하다.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면 당장의 유익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나머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 된다. 상대주으이 문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질병이다.

 

* 신앙의 세속화에서 나타나는 현대인의 종교심성

교회는 현대인의 중교심성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신심의 세속화를 경계하고 성찰하면서,그 안에 담겨 있는 영적인 갈망과 갈증을 발견하고 현대인으 사유방식,종교의식,문화의식을 담아내는 새로운 신앙 감각들을 발견하여야 한다.

 

* 참된 신심과 거짓된 신심

 모든 신심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모든 신심활동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고 하느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신심의 '그리스도 중심적 특성'을 분명히 제시하고,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교육과 쇄신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 대중신심

대중신심은 본질적으로 삶의 중요한 물음들에 대해 그리스도교적 지혜로 대응하는 가치들의 총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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