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다해)

모든 2 2016. 11. 20. 23:30

장항 성당(보령지구)

본당 설립:1943.12.15/주보성인:성모성심

 

+ 루카 복음, 23,36-43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나는 왕이로소이다 - 여준구 아토니오 강경 주임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세자 책봉을 받고 석 달 동안 잠적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코믹한 영화이다. 왕이 되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싫어했다는 충녕대군은 남몰래 궁궐을 넘어 노비의 신분으로 백성들의 고달픈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점점 성군의 자질을 갖춰가고 또한 자신이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게 된다. 그가 바로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칭송받는 세종이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네가 유다인의 왕이냐?'하고 심문할 때 스스로를 왕이라고 하지 않고 왕이 되기를 거부하셨다. 빵의 기적을 베풀었을 때, 군중들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했을 때에도 그분은 다른 곳으로 피해가셨다. 오히려 그분은 세상의 왕들과는 거리가 먼 초라한 삶을 사셨다.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는 그분 말씀대로 병자와 세리, 어린이와 과부 같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는 만민의 왕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라고 고백하며 만군의 주님으로 모신다.

 

  오늘 지내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만물이 그분 안에 존속'하듯이 인간이 전 존재도 그분께 속해있음을 고백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높아진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는 예수님뿐 아니라 오늘의 역사와 현실에서도 똑같이 배운다. 우리는 저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라고 외치며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왕이 되기를 꿈꾼다. 군림하려 하고 지배하려 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마무리하고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왕이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왕이 되기를 꺼려하고 스스로 낮은 신분을 선택했던 충녕처럼 백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그 시대의 칭송받는 왕이요 지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백성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동을 주는 자가 그들 마음속에 각인된 영원하고 진정한 왕일 것이다.

 

 

via의 시선(지금 여기에서..)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바다가 보고 싶은 날입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넓은 백사장을 걷고 싶습니다. 백사장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제가 남긴 흔적들이 보입니다. 파도에 씻겨서 사라지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흔적에 감춰져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곳 백사장에 저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압니다.

 

   세상 모든 곳에는 저보다 먼저 이 길을 지나온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 흔적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양한 인간상들이 보여준 춤은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추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존재 수만큼 다양한 인간들의 상태는 그 다양성만큼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기억은 떨어져 있는 그와 나를 연결해 주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적이 남긴 기억의 상태에 따라서 그와 나의 연결망의 상태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저와 비슷한 의식을 지닌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쏟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메시지가 강력해도 사람들은 각자의 현실을 기준으로 이를 걸러내고, 저마다의 렌즈를 거친 다음에야 해당 메시지를 입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 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지만,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 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비슷한 의식, 파동의 교류가 가능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에너지를 쏟습니다.

 

   보편성을 살아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보편성이란 개별성이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개별성이 인정되지 않는 보편성은 획일이고,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독재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인 '자유의지'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보다는, 지금 내 앞에 현존하는 "그(그녀)"에게 성실하려고 노력합니다. 서로에게 남긴 흔적이 아름다운 기억이 되어, 서로를 위한 관계망의 건강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오늘을 지내면서 내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기억이 오늘의 나를 결정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써서"지금 여기"를 보냅니다. 오늘 행복하소서.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36)>

  

소쩍새, 부디 슬피 울지 않기를


 

   혹시 '소쩍새'를 아시나요? 어린 시절 여름날 저녁 무렵이면 뒷동산에서 매우 구슬프게 울던 '소쩍새'말입니다. 생긴 모양이 부엉이를 많이 닮았다고 하던데, 사실 저도 이 새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이 새가 가끔 생각나는 것은 그 특이한 이름에 얽힌 가슴 아픈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이야기는 다름과 같습니다.


   "가난한 집 딸'소화'는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부잣집으로 시집가게 되는데, 가지 마자 시어머니로부터 찬밥이 생기지 않도록 밥솥에 꼭 맞게 밥을 지으라는 명을 받게 된다. 하지만 솥이 너무 작아 정작 자신이 먹을 밥은 하지 못해 굶어 죽게 된 그녀는 한이 맺혀 한 마리 새가 되어 '솥이 적다'는 의미로 '솟쩍 솟쩍'울게 되었다.


   이런 전설 때문에 우리 선조님들은 소쩍새가 울면 이듬해 흉년이 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던가요? 얼마 후 사람들은 소쩍새 울음소리가 '솟쩍 솟쩍'아닌 '솟적다 솟적다'로 들리면 오히려 '솥이 작으니 다음 해 있을 풍년을 대비해 큰 솥을 준비하라.'는뜻이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소쩍새는 흉년을 알리는 새가 아니라, 풍년을 예고하는 '풍년조'로 변신하여 종종 기쁨의 메신저가 되었고, '솟적다'로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희망찬 마음으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혹시 요즘 우리 동네 뒷산에서'소쩍새'가 운다면 그 소리가 어떻게 들릴까요? 솥이 작아 나눌 것이 없다는 불안과 불만의 소리일까요. 아니면 넘치는 풍요를 준비하자는 희망의 메시지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빼앗아 가는 죄일 것입니다. 오늘의 힘겨움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사람보다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요즘, 소쩍새 우는 소리가'솟쩍'으로 들리지 않고 '솟적다'로 들리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길 기도합니다. 선한 마음을 잃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귓전에 희망의 큰 솥을 준비하는 '솟적다'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려오길 기도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교구 시노드 "우리 함께 걸어요!"

천주교 대전교구 시노드 사무국

http://synod.djcatholic.or.kr

 

 

 

교구 시노드 (synod)란? "함께 길을 걷는다"(Syn+hodos)는 뜻을 지니면, 교구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교구장 주교가 교구 구성원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개최하는 '대의원 회의'를 말합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현재를 진단하고, 해결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며, 이에 따른 교구의 사목 계획이 수립되게 됩니다.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 소식

교구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별 회의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이번 주에는 9개 분과 중에서 평신도, 신심 활동, 교회 운영, 사회복음화 분과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평신도 분과

평신도 분과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언제나 변함없이 최대한 많은 평신도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여러 본당에서 실시 중인 A, B, C 세 그룹의 설문조사와 '본당 한마당 행사'를 통해 신자들이 시노드 여정에 적극적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분과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분과는 이런 기대를 확인하기 위해 본당 한마당 행사를 실시하는 명 군데 본당에 직접 참가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시노드의 과정이 각 본당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 지를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구의 많은 신자들이 은총의 시노드 여정 안에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음화 분과

사회복음화 분과의 큰 과제 중 하나인 '문화 사목' 분야, 특히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습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상업주의의 발전과 만나면서 타라기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 미디어가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교회를 아름답고 다양한 모습을 포용하는 문화적 터전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서 사회를 공의롭게 변혁하는 새로운 문화로 복음을 선포하는 매개체로소 교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대전교구 미디어 센터의 설치를 제안했다는 점입니다. 문화선교는 교회 내 미디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살펴보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전체하면서, 교구 홍보국은 홍보국 대호 필요하지만, 교회 미디어를 통괄하는 미디어 센터를 통해서 평화방송, SNS, 주보 등을 총괄하는 '교구 종합미디어센터'의 기능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단순히 기존의 홍보국이 미디어국으로 개편되는 것이 아닌 열린 구조의 새로운 기구의 설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열린 구조의 새로운 기구의 설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열려 있다'는 것은 교구의 다양한 생태계 안에서 신자들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전문가들임을 인식하고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구조를 말합니다. 주임신부님들이 본당 안에서 사목 위원이나 여러 사람들의 탤런트를 활용하듯이 신자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운영 분과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고 원활하게 상호 소통하는 것은 교회 운영의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교구의 관계와 소통은 정말 잘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주교와 사제, 그리고 사제와 평신도 간의 소통은 과연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교회운영 분과는 검토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만한 관계와 원활한 소통이 어려운 원인을 크게 4가지로 구분 보았습니다. 첫째, 교구 사목지침서가 있지만 교회운영이 이를 충실히 지키지 않고 있으며, 둘째,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성직자들의 인식 전환이 부족하다는 점, 셋째, 하느님 교회에 대한 구성원들의 무관심, 마지막으로 신앙에 대한 충분한 성찰의 부족 등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분과는 현재 각 본당에서 실시중인 설문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각 본당에 논의를 통해 개선안을 제시하자고 하였습니다.

 

신심활동 분과

여러분은 참된 신심과 거짓 신심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분과는 새 복음화를 위한 사목정책을 올바르게 잡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올바른 신심활동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릇된 신심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포함되지만,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그것이 공동체적인 성격을 갖지 못할 때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올바른 신심이란 개인적 신심이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더 나아가 사도적 활동과 봉사 등의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과는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우리 교구의 현실을 관찰하고 그 흐름을 진단하면서, 신심활동의 미래를 제안하는 의안을 작성하자는 목표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사무국 행정지원단 홍보팀

 

대전교구 외부사목환경 분석 3 : 복지 관련

"대전 교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