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연중 제31주일 2016년 10월 30일(다해)

모든 2 2016. 10. 30. 22:30

성남동 성당(대전 동부지구)

본당 설립:1966.3.20/주보성인:베드로와 바오로

 

+ 루카복음.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말씀의 향기>

 

투덜거리지 맙시다! -정재돈 바오로 대천 주임

 

  우리 주변에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모에게 투덜거리는 철없는 자녀들, 배우자에게 투덜거리는 애정 없는 부부들,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투덜거리는 구조 조정 대상 일 순위의 직장인들, 그 밖에도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에서도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사람에 대하여 선현(先賢)들은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충고들을 하였습니다.

 

  "늘 불평하고 남의 욕을 올리는 사람은 성공한 예가 없다."(탈레 방 페리고르)

  "불평 한마디 한마디가 당신 집안에 한 삽, 한 삽씩 무덤 구멍을 파 들어간다."(R. 라이트)

  "불평하는 자는 자기 민중을 무시하고 배척한다."(도산 안창호)

  "투덜거리는 자와 친구도 하지 마라."(J. Paulus)

 

  사실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교만하고, 감사와 측은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공적인 죄인 세관장 자캐오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에 기쁘게 모시는데, 이를 구경하던 불평 불만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며 투덜거렸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루카 19,7)

 

  스스로 옳다고 교만 떨며,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큰 일조를 합니다. 투덜거림이 이웃과 하느님을 죽이고, 더불어 자멸의 길로 간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투덜거리지 말고 칭찬과 격려를 합시다!

  늙어가는 부모님에게 투덜거리지 맙시다.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투덜거리지 맙시다.

  직장에서 투덜거리지 맙시다. 투덜거리면 반드시 쫓겨납니다.

  장상에게 투덜거리지 맙시다. 기도를 해 드립시다. 칭찬과 격려가 오늘날 이 살벌한 시대에 우리 천주교 신자의 성소(聖召) 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시다. 아멘!

 

 

via의 시선(무엇을 해야 할까)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어지럽습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감정은 회색과 빨간색으로 어지럽게 채워져 있습니다.

뉴스를 들을 때마다 깊은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2016년 한국사회,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던 사람들에게서 비정상의 일상화를 목격합니다.

 

  혼이 비정상이 된다는 사람들의 혼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전문가 그룹들이 토의하고 나눴던 모든 이야기들이 강남의 돈 많은 한 여자의 생각이었다는 사실에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소명을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정책과 푸른 집의 전문가들이 제시한 정책들에 대해서 밤새 토의하고 고민해도 부족한 시간을 헛지랄로 채워나갔으니.. 그저 멍한 느낌입니다.

 

   최태민을 위한 300인 공양설이 사람들 사이에 들불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분노로 바뀌고 있습니다.

 

   자신들과 반대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을 향해서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고, 참 나쁜 사람이라는 이유같지 않는 이유로 배제와 고립의 장벽을 세웠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위안부합의를 강제하고 협의 내용을 감추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대상)은 누구일까? 국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 하는 소수의 모리배들과 하늘의 기운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어느 교주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 자비를 다시 묵상합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시는 하느님, 죄인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는 하느님,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께서는 정의에 기초한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평생 어린이로 남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어른이 되어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속의 관리자로써 공동선을 위한 선택을 하는 사람,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남의 말만을 듣는 아이나 종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대리청정과 섭정을 하려는 사람들과 달콤한 말로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환관들이 몰려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현실을 체험하는 지금, 좀 더 많은 어른들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성숙한 어른이 많아진 사회를 희망하면서 내면의 분노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느님 안에서 찾습니다.

 

  오늘 행복하소서.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33)>

 

잊혀진 계절은 이제 그만

 

  팔순을 넘기신 승철이 어머님이 오랜만에 백화점 나들이를 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기분이 좋아지시기는커녕 화만 잔뜩 나 계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들이 어머님께 여쭤 봤습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말이다. 화장품 코너를 지나는데, 빨간색 립스틱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그걸 사고 싶어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젊은 여점원이 나한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거야"

"왜요?"

"내가 설마 그걸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거지"

"에이, 바빠서 그랬겠죠?"

"바쁘긴? 손님도 없어서 한가하기만 했는데.. 조금 있다 젊은 아가씨가 와서 립스틱을 고르니까 얼른 반갑게 맞이하고 생글생글 웃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말씀대로 그 점원이 정말 어머님을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어머님이 편하게 립스틱을 고르실 수 있도록 배려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점원의 태도가 아니라, 승철이 어머님의 마음입니다.


  립스틱보다 붉었던 입술도, 나뭇잎보다 풍성하던 머리카락도 이젠 다 옛날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그 상실감은 생각보다 깊었을 겁니다. 소녀 시절에는 모두 나만 보는 것 같아 붉어졌는데, 이젠 나만 잊혀지는 것 같아 볼이 화끈 달아올랐을 겁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루 앞두고 있는 오늘입니다. 달력엔 달랑 두 장의 그림만 남게 되는 오늘입니다. 세월의 무상함으로 쓸쓸해지려 할 때, 승철이 어머님과 함께 손잡고 저는 묵상 속에서 주님께 이렇게 속삭여 보고 싶습니다.


  "주여, 갖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분노보다, 버려서 가벼워진 자유로움에 기뻐하게 하소서."


  올해 10월의 마지막 밤에는 '잊혀진 계절'을 목놓아 부르기보다, 잊지 못할 주님의 사랑을 기쁘고 또 기쁘게 부르는 축복이 우리 안에 가득하길 바래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바람으로

그리다

한갓되이


닳아지는

삶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교구 시노드 "우리 함께 걸어요!"

천주교 대전교구 시노드 사무국

http://synod.djcatholic.or.kr

 

 

교구 시노드 (synod)란? "함께 길을 걷는다"(Syn+hodos)는 뜻을 지니며, 교구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교구장 주교가 교구 구성원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개최하는 '대의원 회의'를 말합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현재를 진단하고, 해결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며, 이에 따른 교구의 사목 계획이 수립되게 됩니다.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 소식

교구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별 회의 소식을 이번 주제는 9개 분과 중에서 성직자, 수도자, 가정 생명, 교회 운영, 사회복음화 분과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성직자 분과

교회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습니다.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레지오 마리애로 대표되는 모임에서 소공동체 모임으로, 이른바 큰 공동체를 지향하던 방식에서 지금은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성직자 분과는 무엇을 가장 먼저 다뤄야 하며, 어떤 측면에서 쇄신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 분과는 '교육'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보았습니다. 교육 중에서도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오랫동안 논의되었습니다.

 

수도자 분과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은 남성 수도자의 존재를 알고 계신지요? 많은 신자분들이 신부님과 여성 수도자의 존재는 잘 알고 있지만, 남성 수도자의 존재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수도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나라의 남성과 여성 수도회가 한국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으며, 또한 가장 의미있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특히 사회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활동에서 남녀 수도자가 참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무엇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남녀 수도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생명 분과

"특화사목 분과""가정생명 분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분과 조직 구성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당초 성지, 청소년, 가정, 노인, 교정, 병원사목 등의 6대 분야 중에서 성지분야가 신심활동 분과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운영 분과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회인사'에 대한 발표와 토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노드를 통해 '인사시스템의 구축', '인사위원회의 설치', 그리고 '성직자국의 설치'등을 건의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토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사회복음 분과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성장하여 한국사회의 새로운 성인 세대로 등장하는 시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사목'이란 분리된 표현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그려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회복음화 분과는 이런 질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본당이 이주민과 공동사목 본당이 된다면? 이주민 자녀가 내 자녀와 친구가 된다면? 이주민 자녀가 내 자녀와 결혼한다면? 그리고 이주민 자녀가 나의 배우자가 된다면?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재작년 여름 한국에 오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주교님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하는 교리교육과 강론을 통해 신자들의 정신에 사회교리가 스며들도록" 하라고 두 번이나 정신에 사회교리가 스며들도록"하라고 두번이나 강조하신 바 있으며, 이에 따라 강론을 준비하는 신부님들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강론을 듣고 나서 "신부님 말씀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의 격려에도 힘을 받을 수 있지만, 사실상 사회교리에 바탕을 둔 강론을 했을 때, 성직자들이 위축되는 경향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복음화 분과에서는 그분들을 응원하면서 그런 강론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사무국 행정지원단 홍보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한 개괄적인 이해

교회를 새롭게 바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무엇을 주제로 다루었나?

 

 

 

VI.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과 및 의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안팎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부에서는 공의회가, 신학을 다원주의로 인한 신앙의 약화, 신자 감소, 성소자 감소, 교황과 주교의 권위 약화, 교회의 영향력 약화,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으로 인한 교회 분열 촉진, 종교 무분별주의 야기 등의 문제를 가져왔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 쇄신의 견해를 가진 이들은 교황 요한 23세의 '아죠르나멘토'(aggioranamento)를 구현하기 위해 내적 동요는 필요한 과정이라면서,

 

"새로운 전례 생활에 있어서 모국어 사용으로 신자들은 미사에 적극적 자세로 참여하게 되었고, 하느님 백성의 교리는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 데에 평신도의 광범위한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한 교회 일치 자세는 교파주의의 다툼을 진정시켰고, 반종교개혁에 종지부를 찍었다. 종교의 자유는 교회가 다른 종교에 대한 불관용의 비난에서 벗어나 종교 관용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고, 종교 간 대화는 다른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면서 이는 토착화 선교방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역사상 제일 큰 규모의 공의회이면서, 그 성격상 예전의 공의회들과 달리 교회의 교리를 공격하거나 교회 일치를 저해하는 것을 다루기 위해 소집되지 않았다.

 

  교황 요한 23세는 개회 연설에서 공의회의 목표는 교회의 주요 교리를 토의하며 전통적 교리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면서 이러한 신학토론을 위한 것이라면 공의회가 아님 역설하였다. 교황은 "과거에 교회가 언제나 오류를 엄격하게 정죄하였으나, 오늘날의 교회는 자비의 약으로 고치고 자신의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현대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낫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공의회의 목적은 불화의 씨앗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평화와 일치를 증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과거에는 교회가

언제나 오류를

엄격하게 정죄하였으나,

 

오늘날의 교회는

자비의 약으로 고치고

자신의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현대 요구에 응답해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우리의 본분이다.


"세계 곳곳에서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공의회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간절히 묻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할 말이 없습니까?
우리 위정자들에게? 우리 지식인들,노동자들,예술가들에게?...우리 여성들에게?
우리 젊은이들에게,우리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간청하는 이 목소리들은 응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공의회는 이 모든 이를 위하여 4년 전부터 일해 왔습니다.
...이제 가장 권위 있는 공의회의 대변인들이
그 기쁜 소식을 여러부의 이름으로 온 인류에게 전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메시지 중에서(1965.12.8)-

  이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괄적 이해'를 마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겠습니다.

 ...................................................................................................................................... 사무국 행정지원단 교육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