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연중 제 29주일 2016년 10월 16일 (다해)

모든 2 2016. 10. 16. 22:30

하기동 성당(북부지구)

본당 설립:2006.1.10/주보성인:프란치스코

 

루카 복음. 18,1-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말씀의 향기>

 

기도합시다 - 이원무 베다 하기동 주임

 

  에수님은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당부하신다. 무엇보다 빠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오관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에 만족해하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음 같아서는, 더 좋은 것을 더 짧은 시간에 얻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바람이지만, 다른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데에, 인내심을 넘어 항구한 자세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은 미적거리기를 좋아하는 분이셔서 그래야 하는 것일까?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는 분'(마태 6,8)이시니,우리가 원하는 때보다 오히려 더 먼저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항구한 자세가 필요한 것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불의한 재판관이야 어쩔 수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리겠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올바른 판결을 지체없이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 '올바른 판결'을 우리가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기뻐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신뢰'가 필요하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고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 말이다. 하느님의 이끄심과 은총에 놀라워하고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그 과정까지 다 이해하고 따라간 사람은 없다.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뿐이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쪽으로 하느님을 이끌기 위해서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 내가 나아가기 위해서 드려야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나한테 맞추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하느님께 맞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능률과 실적을 중요하게 여기고, 모든 가치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통하여 평가한다. 이 안에서 하느님을 따라 나서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를 잊을 때도 있고 소홀히 여길 때가 있을지 몰라도, 악의 세력은 연중무휴 24시간 지치지 않고 활동하니, 하느님의 손길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끊임없는 기도가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via의 시선(가난함에 대하여)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가난함을 주소서!" 서품 후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드렸던 기도입니다. 사제품을 받고 18년을 채워가는 지금, '가난함'이 무엇인지 찾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함과 사회적 구조 안에서 경험되는 가난의 상태는 동일한 것인가? 만약 동일한 것이라면 사회적으로 경험되는 가난의 상태는 교회가 가르치는 '덕'의 실현이 됩니다. 가난하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그대로 가난함을 유지하다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니 오히려 가난은 은총이라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가난함이 은총이 될 수 있을까? 첫미사를 봉헌하면서 드렸던 가난함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기도했던 가난함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내가 아니라 자유로운 나를 희망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혹은 어느 누구의 종으로 살 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 안에서 가난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편리와 풍요가 자리를 잡았고, 편리와 풍요 그리고 편리와 풍요를 정당화시켜주는 합리화의 기제는 가난함은 오직 정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많이 그리고 더 많이"가지고 있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풍요와 편리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대출을 해주면 된다고 하고, 그 자식들에게는 장학금을 조금 더 주고, 선별적으로 밥값과 생리대를 지원해 주면 된다고 속삭입니다. 풍요의 상대적 차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지갑을 열어서 돈을 내면 된다고 합니다. 지금의 나를 정당화시켜주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그 정도까지 만을 실천하면 가난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유하지 않은 상태를 가난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궁핍함은 '악'입니다. 궁핍함은 최소의 나눔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 사회적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궁핍함은 깨뜨려야 하는 어둠입니다. 오히려 가난함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가난함은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에 관한 응답입니다. 그리고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성경의 가난함은 사회적 가난의 구조를 깨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함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회가 아닌 가난함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금 여기의 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드립니다. 주님, 가난함을 주소서. 아니 가난함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31)>

 

지붕 위에 신발 던지기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마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 위쪽에 있는 마을에는 산 아래쪽 마을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 지붕 위에 던졌다가 아침에 밖에 나갈 때는 지붕 위로 올라가 신발을 찾아 신는 일이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번잡해 보이는 그 광경이 하도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어 아래쪽 마을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결국 위쪽 마을 사람에게 불어보았습니다.


   "아니, 신발을 그냥 밖에 벗어 두면 되지, 어째서 지붕 위로 던지는 거요?" 그러자 위쪽 마을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루를 돌아보려고요." "신발을 던지는 일이 하루를 돌아보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잠들기 전에 천정을 바라보면 신발이 생각나고, 신발이 생각나면 내가 오늘 하루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그리고 거기에서 누구를 만나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떠오르니까요. 그걸 생각하면서 잠들면 내일은 오늘 한 실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거든요."


   그 순간, 아래쪽 마을 사람은 자신의 신발을 떠올렸습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당에 아무렇게다 벗어던진 신발 말입니다. 위쪽 마을 사람은 이제 돌아가면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 법부터 실천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집으로 향했습니다.


   신발은 움직이는 일기장입니다. 신발을 통해서 내 하루의 흔적을 되짚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제일 먼저 신발정리부터 하라고 하셨던 어머님의 깊은 뜻을 이제야 마음으로 느껴 봅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어 비록 지붕 위에 신발을 던질 수는 없지만, 기도를 드리는 일이 결국 지붕 위에 신발을 던지고 하루를 돌아보는 일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나는

내 쓰임새를 다하며

살아온 것일까.

 

문득

되돌아보는

시월의 아침.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교구 시노드 "우리 함께 걸어요!"

천주교 대전교구 시노드 사무국

http://synod.djcatholic.or.kr


 

 

교구 시노드 (synod)란? "함께 길을 걷는다"(Syn+hodos)는 뜻을 지니며, 교구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교구장 주교가 교구 구성원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개최하는 '대의원 회의'를 말합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현재를 진단하고, 해결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며, 이에 따른 교구의 사목 계획이 수립되게 됩니다.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 조직이 일부 개편되었습니다."

 

 

 

 

  시노드 준비위원회의 9개 분과위원회(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전례, 신심 활동, 본당 사목, 특화 사목, 교회 운영, 사회복음화)에서는 현재 교구의 상황을 각 영역별로 진단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며, 이를 바탕으로 의제 선정 작업이 진행될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 과정 안에서는 분과별 다양한 활동 내용의 공유와 각 분과에서 다르게 되는 주제 영역에 관한 상화 협의와 조정이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시노드 중앙위원회가 매월 1회 개최되어 시노드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각 분과별 활동 내용 공유 및 업무 협의를 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제1차 중앙위원회(2016.8.23)에서 특화사목분과의 활동 방향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제2차 중앙위원회(2016.8.23)를 통해서 시노드 준비위원회 조직 일부를 개편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전례, 신심 활동, 본당 사목, 특화 사목, 교회 운영, 사회복음화) 중에서 '특화 사목 분과'를 재구성하여 '가정 생명 분과'와 '신심활동분과 산하 순교현양 소위원회'를 신설하였습닏. 이렇게 기존의 특화사목분과는 '가정생명분과'와 '순교 현양 소위원회'를 통해서 보다 유기적이고 효과적으로 활동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