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산성리성당(홍성지구)
본당설립:1988.8.17 / 주보성인:성 미카엘
+ 루카 복음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뜨니,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자락을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형제가 있는데,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하고 대답하자,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내가 만든 '구렁'은 ? -유탁준 라파엘 월평동 주임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의 말씀은 자만심에 빠져 있는 부자들에게는 무서운 경고가 되고,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라자로는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에서 언급하신 '가난한 사람들,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지금 웃는 사람들'의 대표이고, 부자는 불행선언에서 언급하신 '부유한 사람들,지금 배부른 사람들,지금 웃는 사람들'의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단순히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하느님과 이웃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착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을 다시 읽으면,'행복하여라,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말씀은,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나라에서 행복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불행 선언에서 "그러나 불행하여라,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라는 말씀은,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지옥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거부하고 세속적인 물질과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부자가 라자로에게,그리고 모든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했다면,비록 그의 재산이 남아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재산보다 더 귀한 하느님의 복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라자로가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다는 것은 부자에게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사실상 그런 상황 자체가 곧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지금 내 곁에 있는 '나보다 가난한 이'의 존재는 내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그의 존재 자체가 곧 은총인 것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한 방울의 물을 청했을 때,아브라함은 '큰 구렁'이 막고 있어서 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큰 구렁'은 부자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자기만 혼자서 호화롭게 살면서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만들어 놓은 거대한 벽이 바로 '큰 구렁'입니다. 한방울의 물도 얻어먹지 못하게 된 것은 부자 자신이 지초한 일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만든 구렁(벽)에 자기 자신이 갇혀버렸습니다. 부자의 어리석음과 욕심이 만든 '구렁(벽)'은 오늘은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내가 만든 구렁은 무엇인가?
부자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via의 시선(오늘의 기도)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강,생명의 바닥입니다. 이른 아침,하늘을 쳐다봅니다.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을 가슴에 받아들이고 땅 위를 걷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마시는 물의 본성이 몸을 깨우기 시작하면 성체 앞에 앉습니다. 단순함의 기도,내재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에 동의하면서 하느님의 섭리에 오늘을 의탁합니다.
생명의 바닥 위에서 오늘을 살아야 하는 생명들에게 바닥의 상태는 생명의 유지와 지속을 결정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땅이 보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땅이 보이는 이유는 하늘과 땅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보면 하늘이 보이는 이유도 같습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궁창에 있는 물을 위와 아래로 갈라놓으시니 그렇게 되었다."
하나였던 물을 갈라서 둘이 되게 하였으나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 창조 속의 모든 존재는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존재이고,각각 존재들은 서로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한 먹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먹은 것은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됩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음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다른 생명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고,다른 존재 안에 이미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세상 속에서는 자원이라고 불려져야 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내가 되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산에 오르다 보면 꽃을 만납니다. 조용히 이름을 지어 불러 봅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꽃은 꽃을 넘어서 하느님 창조를 드러내는 빛이 됩니다.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동반자가 됩니다. 산림자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 창조를 증거하는 생명으로 만나게 됩니다.
생명의 바닥인 땅과 하늘,바다와 강에서 수많은 생명들과 상봉하면서 살아갑니다.
감탄의 마음으로 빛을 통해서 빛을 봅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수많은 생명들의 바닥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강 속에서 만나야 하는 생명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생명이 사라진 세상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아니 살아갈 수 있을까요?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도합니다. 드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지속시킬 수 있는 지혜를 청합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28)>
마네킹보다 허수아비가 되련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한 남자와 한 여자,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여자 눈에 다른 남자가 들어옵니다. 언뜻 보기에 수려한 외모에 눈을 뗄 수가 없던 여자는 새 남자를 만나기 위해 떠나려 합니다. 그러자 남아있는 남자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래전에 난 아주 초라한 집에 살았는데,건너편 집들을 보곤 했지. 그쪽 사람들은 더 행복하고 방에 햇빛도 더 잘 들고 파티도 더 재밌을 거라 생각했어,하지만 그들의 방은 어둡고 더 작았어,그런데 그들도 역시 우리 집을 바라봤었어. 왜냐하면,우린 항상 행운은 자기 안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파뜨리스 르꽁트' 감독의 "걸 온 더 브릿지" 안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끔 '건너편' 집들을 바라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쪽 세상은 여기와는 많이 다르고,그쪽 사람들도 나와는 많이 다르며,그곳에는 여기에서는 맛볼 수 없는 행복이 가득할 것만 같은 눈으로 바라볼 때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다른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휴가,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다른 사람들의 아들과 딸은 왜 그렇게 화려해 보일까요?
귀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정작 눈으로는 이웃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영화 "걸 온 더 브릿지"의 대사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꽂힙니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길 때,그때가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는 건너편 집을 향한 시선을 주님의 집으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빼앗긴 시선을 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기적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쇼윈도의 마네킹이 되기보다,가을 햇살 아래 내 삶의 들판이 성숙하게 익어 가는지 지켜보는 허수아비가 되기 위해 오늘 밤 더 정성스레 주님께 기도하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산뜻한 맑음과 청아한 내음
촉촉한 향기로
무르익은 이 길 위에서
더 바랄 것 없이 드리는
한 줄의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교구 시노드 "우리 함께 걸어요!"
시노드 알림터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 소식
이번 주에는 9개 분과 평신도,수도자,전례,신심,교회운영 그리고 본당사목 분과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평신도 분과
평신도 분과의 한결같은 고민은 교구의 모든 평신도 의견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신도 분과는 더 많은 평신도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쉬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위원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평신도 분과는 위원들이 뽑은 주제들을 세분화하여 앞으로 계획 중인 본당 대상 설문조사를 위한 내용 작성에도 성실하게 임하기로 하였습니다.
신심 분과
신심 분과 기도에 대한 실태조사,신심의 정의와 종류,신심과 전례의 관계 등에 토의했습니다. 신심 분과가 추구하는 것은 '시노드를 위한 시노드'가 아니라 '교구가 새로워지느 시노드'입니다. 그래서 신심이 전례 안에서 풍성해지고 사도직으로도 연결되어야 하는 점에 대한 방법론적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우선적으로 시노드 기도문에 담겨 있는 '시노드와 신심'의 의미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분과의 진단과 정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본당사목 분과
본당사목 분과는 '소공동체와 통합사목'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와 '예비자 교리와 신자 재교육'에 대한 의견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특히 '소공동체와 통합사목'에 대해서 소공동체의 공통적이고 명확한 개념을 제시하여,그것을 교구적 차원에서 공유해야 할 필요성이 제안되었습니다. 또한 '예비자 교리와 신자 재교육' 부분에서는 신자 재교육만이 아니라 예비자 단계부터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통해 계획적인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수도자 분과
수도자 분과는 '수도자들을 위한 시노드'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대전교구 시노드'를 준비한다는 공감대 속에서 대전교구의 상황과 현실에 구체적으로 연계되는 수도자들의 정체성과 현실적 상황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수도자들이 마주한 현실을 알아보는 인터뷰 조사팀(6명)과 조사팀의 분석 결과를 교회 문헌들을 통해 조명하여 의안집을 작성하는 연구팀(5명)으로 위원 역할을 분담하여 효율성과 책임감을 갖고 분과의 목적을 달성해가기로 했습니다.
전례 분과
전례의 공간인 성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성전은 전례가 거행되는 거룩한 장소이며 한번 지어지고 나면 개선이 어려운 요소입니다. 따라서 준비과정부터 참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성전 건축 지침이 제공되어,본당뿐 아니라 설계와 시공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마련되었으면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교회운영 분과
우리 교구의 교회운영이 가져야 할 핵심 주제는 '순교 정신에 기초한 교회운영'이라는 데 모두 공감하였습니다. 교구,지구,본당 등의 가장 이상적인 운영 모델은 순교정신이 투영된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고,내가 먼저 변화하려는 노력을 통해 공동체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교화운영 모델이 제시되도록 분과의 논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시노드 배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한 개괄적 이해
II.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진행과정-제1회기
1962년 10월 11일,전 세계 2,908명의 교부들 중에서 2,540명-공산권 교회의 주교들은 참석에 제하을 받았다-과,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동방 교회,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17개 교파 35명의 대표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받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개회 연설에서 세 가지 신비로운 일치,즉 가톨릭 신자 사이의 일치,가톨릭 신자와 갈라진 그리스도인의 일치,가톨릭 교회와 그리스도교와 다른 신앙을 지닌 종교인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공의회의 임무라고 강조하였다.
약 2개월간 지속된 제1회기 동안 공의회는 각 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하였고, 전례,계시(신앙의 원천),매스컴,동방 교회와의 일치,교회에 관한 안건 등에 대해 토의하였다. 각 사안에 대해 보수파와 진보파는 격렬하게 논쟁하였으나,결국 제1회기 중에는 공의회
에서 채택될 만한 초안이 하나도 없었다. 12월 5일 교황은 준비 위원회가 작성한 초안들을 사목적 관점에서 다시 검토하고 준비위원회의 작업들을 지휘하는 '조정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공의회는 휴회 기간에 들어갔다.
1962년 12월 8일 제1회기 폐회 연설에서 교황 요한 23세는,공의회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바치는 행위,하느님의 계명을 따르
는 행위,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행위라고 정의하였다. 교황은 공의회 중에 보인 견해의 차이는 놀랄 일이 아니며 견해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논쟁은 좋은 결실을 맺는 데에 유익하다고 하였다. 덧붙여 교황은 다음 회기까지 공의회의 작업은 계속되며 '조정위원회'가 설립되어 공의회의 업무를 조정하고 지도하면,위원회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황은 공의회에서 나올 구원의 결실을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갈라진 형제들과 그리스도교와 다른 신앙을 지닌 종교인들도 거두기를 희망하였다.
교구 시노드에 대한 사제단 인터뷰 요약①
교구 시노드를 시작하면서, 교구 내 사제들이 시노드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제들은 대체로 "이번 시노드가 시기저절하고 필요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구 설정 70주년을 맞이하면서 현대 사회의 다양하고 빠른 변화의 흐름 안에서 교구의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식별하여 미래의 발전방향을 구상해볼 필요서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견과는 반대로 교구장 주교님과 교구사제단의 공감대 형성과 명분 이해가 더 필요하다는 면에서 "시노드 개최의 적절성과 필요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한편 과거 다른 교구 시노드 결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교구 시노드 개최를 우려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교구가 결정한 대로 순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잘 되기를 바란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제들은 "주교님과 사제들의 관심과 참여는곧 신자들이 관심과 참여로 이어지기 때문"에 주교님과 사제단의 적극적인 만남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시노드 사무국에는 지속적으로 시노드에 대한 동기 부여를 부탁하면서,사제들에게 시노드에 대한 홍보와 교육을 좀 더 증대 시켜 본당 사제들을 통해 신자들의 참여가 확대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타교구의 시노드 결과에 대한 장점과 좋은 영향들을 계속 부각시켜 줄 것도 부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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