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동 성당(대전 중부지구)
본당 설립: 1985.2.18 /주보성인 : 한국 순교 103위 성인
+ 루카 복음 16,1-13 <또는 16,10-1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말씀의 향기>
이제는 여러분이 증거 할 차례입니다. <103위 시성식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
-곽명호 루카 노은동 주임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은 기해박해,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와 병인박해 대 순교한 24위를 1984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된 103윌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호교론 50,13)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교부 떼르뚤리아누스의 말처럼,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그야말로 순교자들의 피 위에서 핀 찬란한 꽃이다.
순교자들에 대한 강론을 준비하면서 식상하게 그분들의 삶과 순교 여정을 나열하지 말자는 생각을 늘 한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고결한 삶과 죽음을 마치 무슨 약력을 소개하듯 하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분들의 순교 행적을 나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상을 말할 수가 없었다. 묵상하면 할수록 순교란 그 자체로 놀라운 신비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신비를 나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처럼 큰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대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피 흘려 혼연히 순교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는지...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생각을 해도, 늘 나 자신을 떠날 수 없는 옹졸한 나에게는... 늘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순교의 깊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교자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분들을 이토록 그리스도께 대한 강렬한 사랑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같은 순교의 길을 걸으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나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맞다.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다. 그저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확고하고 강력한 확신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순교는 신비가 아니라 삶이고 희망이다.
그러한 확신으로 순교자들이 증거한 믿음을 이제 우리가 증거할 차례다.
via의 시선(걷는 이유)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가끔 여행을 갑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홀로 여행입니다. 여행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는 것은 주변에 가능한 길이 있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걷습니다. 가능한 포장된 길은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포장된 길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길이 아니라 차를 이용하기 위해 만든 길이어서, 오랜 시간 걸으면 몸의 활력이 줄여듭니다.
길을 걸으면서 가야하는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걷는 나를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혼자 걷고 있는 나에게 묻습니다. 지금 왜 걷고 있는지? 걸으면서 무엇을 만나고 싶은 것인지?
걷다 보면 고통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고통이 발생하는 신체부위를 살펴봅니다. 그리 크지 않은 상처가 온 몸을 힘들게 합니다. 때론 정신까지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온 존재를 흔드는 작은 상처, 고통을 느끼는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통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된 순간, 통합적(Hollistic)인 존재로서의 나는 사라집니다.
길 위에서 나를 바라봅니다. 감정에 지배된 나를 인지하게 되면 상처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기적 연결고리로 이어진 몸은, 몸의 상처를 통해서 내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상태를 예시합니다.
어둠을 빛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빛이 없는 상태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빛을 발산합니다. 그래서 빛이 없다는 것은 내재된 빛을 발산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빛을 발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둠을 좋아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빛을 발산함을 통해서 경험된 두려움의 체험이 빛의 발산을 방해합니다.
나를 본다는 것은 내 안의 어둠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일으킨 작은 부분이 존재를 흔드는 것처럼, 내 안의 어둠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하느님과 만나는 자신의 현재를 알려주는 분명한 표지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 길을 걷습니다. 직면을 통한 변화를 희망하면서 주어진 오늘,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27)>
미식가들의 인내심에 감사함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점심 먹는 것도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엇을 먹으러 갈지, 누구와 함께 가야할 지 결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점심 식사하러 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식사하러 가는 동료들이 오늘은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자꾸만 제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본인들이 결정하고 나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좋을 텐데, 왜 나보고 결정하라고 하지?"
동료들이 살짝 원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음식에 대한 제 안목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뿌듯함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난 미식가가 아니라 편식가인 편인데, 그동안 사람들이 왜 나보고 메뉴를 정하라고 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놀랍게도 그것은 안목이 아니라 저의 고집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순순히 따르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제 의견을 굽히지 않는 고집말입니다.
편식가가 미식가의 말을 듣지 않고, 거꾸로 미식가들이 편식가의 의견을 존중해 주느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들의 인내심에 새삼 미안함과 고마움이 커졌습니다.
미사 때마다 모든 건 내 탓이라고 가슴을 치면서 그렇게 외쳤건만, 왜 저는 미처 그걸 모르고 살았던 걸까요? 혹시 이런 일이 음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여러 순간에도 반복된 건 아닐까요?
그제서야 음식만 편식한 것이 아니라, 살면서 많은 부분에서 편견과 편애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합리적이고 너그러운 줄 알고 우쭐했던 오만한 모습도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노력은 모래알처럼 작아 보이고, 내 노력은 바위처럼 커 보인다면, 누구나 쉽게 인생 편식가가 됩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 욕심만 많아지는 편식가가 아니라, 인생의 참맛을 아는 진정한 미식가로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갈아엎을
황무지에도
꽃들은 피어
봄가을 없이
잔잔한 그 향기
마음에 가득 저며 옵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교구 시노드 "우리 함께 걸어요!"
시노드 알림터
시노드 준비위원회 분과소식
지난 7월 5일 출범한 교구 시노드 준비위원회는 9개 분과별로 약 30차례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번 주에는 평신도, 전례, 신심, 교회 운영 그리고 사회복음과 분과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평신도 분과
9개 분과 중 유일하게 평신도 위원장이 있는 분과입니다. 총 10명이 활동 중인 평신도 분과는 각각의 위원들이 '2-3개 소주제'를 담당하여, 해당 소주제의 개념 정리와 그 개념 안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설문지의 유형들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간추린 10가지 소주제에 대한 수정과 토론이 있었는데, 토의 과정에서 '교회 안에 여성신자들의 위치와 편견'이라는 주제를 추가로 포함시키자는 의견에 모두 일치하였습니다.
신심 분과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전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서 전례로 이끄는 신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전례가 더 풍요로워지고, 구원의 신비가 내 삶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신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례는 전례를 거해할 수 있는 사제를 통해서 할 수 있지만, 신심 행위는 자신이 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할 수 있으므로, '전례와 심심 행위'가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신심이 전례보다 상위로 가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다음 회의에서는 대중신심과 전례에 관한 교회의 지침을 되짚어 보게 될 예정입니다.
전례 분과
전례분과는 전례 안에서 공동체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본당 공동체는 가톨릭신앙을 배우는 장이며 실천 무대이지만, 신앙의 개인화는 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 진단과 올바른 신앙교육을 위한 개선점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또한 성가는 본당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전례의 중요한 부분이므로, 전례 참여를 이끌어주는 성가대의 역할기 중요하기 때문에 교구 차원에서 성가대에 대한 진단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누었습니다.
교회운영 분과
교회운영은 사람과 일에 관한 것이지 조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분과에서는 조직,재무,그리고 행정만을 강조하면 '사람'을 놓칠 수 있다는 데 일치하였습니다. 시스템,행정,재정에서 '사람'이 빠지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세부적인 시스템을 정립하는 방향보다는 큰 틀에서 대원칙을 제시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한 시스템은 절차이므로 교회운영 시스템에서도 역시 영성, 신심, 사목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회복음화 분과
사회복음화 분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복음의 기쁨」'제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의 주요부문을 정독했습니다. 교황님의 말씀대로 '교회, 교구, 교황청 등 모든 교회 공동체의 목적은 교회의 조직화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다가가려는 열망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시노드의 목표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 모두 공감하였습니다.
시노드 배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한 개괄적 이해
1. 공의회의 준비
1959년 1월 25일에 성바오로 대성전에 서 미사를 봉헌한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소집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발표는 교황이 나중에 고백하였듯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떠올라 이루어진 것으로, 그는 이러한 생각을 초자연적 영감으로 판단하였다.
1959년 5월 17일 교황 요한 23세는 준비 위원회를 설치하여 위원장에 국무성 장관을 임명하고 10여 명의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6월 29일에는 회칙 <베드로 좌>(Ad Petri Cathedram)를 통하여 공의회의 세 가지 목적, 즉 가톨릭 신앙의 발전, 그리스도인의 생활 쇄신, 교회 규율의 현대 적응화를 제시하였다.
1960년 6월 5일에는 자의 교서(하느님의 드높으신 뜻) (Superno Dei nutu)을 통해 3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산하에 신학, 주교 및 교구 행정, 성직자와 그리스도인 규율, 수도자 성사 규정, 전례, 교육 및 신학교, 동방 교회, 선교, 평신도 사도직, 매스컴,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의전 위원회 등 총 13개 위원회를 조직 및 설치하였다.
1961년 12월 25일 교황은 사도 헌장 <인간의 구원>(Humamae Salutis)을 통해서 1962년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공의
회가 소집된다고 공표하였다. 1962년 2월 2일 공의회 개회일을 10월 12일로 확정한 교황은, 이미 1월 6일 성직자들에게 공의회의 성공을 지향하며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촉구하였고, 4월 15일에는 주교들에게 경건한 생활 자세를 갖추도록 조언하였으며, 4월 28일에는 신자들에게 공의회가 좋은 결실을 거두기 위해 묵주기도를 통해서 성모님께 간구하도록 요청하였다. 아울러 공의회 동안에 하느님의 도우심과 비추심을 청함에 있어서 덕행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1962년 8월 6일에는 자의 교서 <다가오는 공의회> (Appropinquante Concilio)를 통해 공의회 진행에 관한 지침서를 발간하였다.
교구설정 60주년을 기념행사를 하면서 우리 교구에 시노드 형식에 해당하는 뭔가가 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일정한 시기를 주기로 개인이든 공동체든 정체성에 대한 반성과 쇄신이 필요한데, 지난 몇십 년 동안 규모면에서 크게 성장한 우리 교구도 사제단과 평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교구의 모습을 깊이 있게 되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상대적으로 후발 자본주의로 시작하였습니다. 급속한 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사람을 소중하게 윤리적인 가치가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군사 독재의 시기를 통해 이루어졌고 남북한 대치라는 상황까지 함께 맞물리면서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판단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 교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많은 순교자들의 신앙증거 정신을 본닫아 모든 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를 이번 시노드를 통해 마련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전 시노드에서는 여러 주제가 논의되겠지만, 저는 큰 방향에서 선교와 사회복음화를 좀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례 받은 신자들을 영적으로 관리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선교지향으로 변해야 한다는 여러 교황님들의 말씀을 새겨 보면서, 교회가 선교 지향이라는 본연의 소명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뿐만 아니라 신자수 증가를 넘어서 사회복음화를 동시에 수행해 나가는 길을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노드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미리 염려하기보다 어떤 어려움들이 발생한다면 그 문제들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 안에서 함께 길을 찾아간다면 때에 따라 그런 과정이 그동안 우리 안에 숨겨져 왔던 부족함을 오히려 더 잘 볼 수 있게 하는 은총의 기회가 될 수 있기에 말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시노드 여정이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서로 다른 소명을 존중하면서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같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동질성을 더 잘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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