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촌동 성당(대전 동부지구)
본당 설립:2000.2.21/주보성인:황석두 루카
+ 루카 복음. 14,1.7-14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말씀이 향기>
겸손의 삶- 김한승 라파엘 대사동 주임
얼마 전 어느 신자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신자들은 똑똑한 신부님, 강론 잘하는 신부님,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시는 유능한 신부님보다는 겸손하고 마음이 따뜻한 신부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며칠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사제로 살아온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 본당 신부님이나 신학교 신부님들로부터 '겸손한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제의 삶은 겸손을 실천하기에는 오히려 어려운 여건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식사 이야기가 나오지만, 사제는 초대받은 식사 자리에서 늘 가운데에 앉게 되고, 식사가 모두 끝나면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항상 듣게 됩니다. 밥을 얻어먹고도 고맙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늘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내 주장을 굽히지 않은 때가 많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주로 내 말을 하면서 지내온 게 사실입니다. 결국 교만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구나'하고 쉽게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의 생각은 틀렸더.'라고 단정하게 내 주장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나를 아끼려는 마음만큼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은 겸손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있고, 이웃과 다투게 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모릅니다.
벨라도 성인께서는 "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우리의 허영에 날뛰는 교만을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가"라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예수님께서 이처럼 자신을 밑으로 낮추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위로 자꾸 올라가려고만 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감추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남 앞에 나서려고 하며,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당신보다 높이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남을 멸시하며 높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참된 겸손은 착한 사람에게서도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점점 자신을 꾸짖고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정말 힘든 덕목인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자세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어야 합니다."
* via의 시선(감사의 이유) /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내가 만나는 그"를 내 안에서 경험합니다. 나의 거울인 그를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것은 그 안에 나의 한 부분이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보고 분노하는 이유는 그 안에 보고 싶지 않은 내가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고, 내가 그를 보고 기뻐하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내가 공감과 공유 속에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투사의 기제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성숙함과 미성숙함의 차이는 투사의 대상을 통해서 경험하는 자아의 태도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매일 땅 위를 걷듯이 하늘을 바라봅니다. 땅 위를 걸으면서 내가 서있는 지금 여기의 상태를 경험하고, 하늘을 보면서 지향해야 하는 가치를 기억합니다.
하늘을 보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의 상태를 관조하면서, 하늘을 향한 발걸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땅 위를 걸으면서 하늘의 가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땅 위를 걷는 행위를 멈추기도 합니다. 움직임이 있는 상태에서 현재를 바라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움직임과 멈춤은 하나입니다. 멈춤은 움직임을 위한 시작이기에 정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움직임은 멈춤의 선택으로 갈마들게 되는 또 다른 시작의 결과입니다. 타인을 올바로 만나기 위해서는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요청되는 것은 관찰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관찰을 하다 보면 나와 다른 그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와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와의 알맞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투사를 통해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한계를 발견하는 것은 고통이지만, 한계를 지닌 나를 보듬어 주시면서, 내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기도를 봉헌하게 됩니다. 구겨진 나를 감싸안고 오늘 삶 속에서 동반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교구 시노드 "우리 함께 걸어요!" -시노드 사무국
시노드 준비 단계 안에서의 활동들 2(시노드 본당위원회)
# 지난주 시노드 준비 단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두 위원회 중 '시노드 준비위원회'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다른 하나인 '시노드 본당위원회'(이하 '본당위원회')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시노드가 교회 안의 다른 회의들과 다른 점은 '모든'구성원의 참여가 더욱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하느님 백성 즉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의 참여가 얼마나 많이,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데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당위원회는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교황청 훈령은 다음과 같이 그 중요성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대의원회의에서 다룰 주제들과 관련해 신자들에게 그들의 요구와 바람,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교구 성직자들에게는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사목상의 어려움에 대한 답변서 형식으로 건의함을 작성하도록 개별적으로 요청해야 하며, 지역사회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는 하느님 백성의 모든 활력소들, 곧, 본당 공동체에 골고루 자문을 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본당위원회는 이러한 중요성을 토대로 이번 교구 시노드 안에서 다음과 같이 목표를 가지고 운영됩니다.
1. 본당 공동체 안에서 시노드의 '함께 길을 걷는 정신을 구현
시노드의 목표는 교구 내 하느님 백성 전체의 복음화를 위한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단위인 본당 사목구(이하 '본당')에서 시노드의 정신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교구상 주교님께서는 매년 현 교회가 직면한 상황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의 교도권에 비추어 해석하고 그에 따른 사목지표를 마련하십니다. 이러한 사목지표는 본당의 주임신부님과 신자들의 대표인 사목평의회의 협력을 통하여 본당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됩니다.
시노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노드 기간 동안에는 각 본당에 구성되는 본당위원회를 통하여 시노드의 개념인 '함께 길을 걷는 정신'을 구현할 것입니다. 본당위원회는 시노드에 대한 이해와 구체적인 회의의 참여를 통하여 본당 내 모든 구성원이 시노드의 참 정신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2. 시노드 기간 내 교구와 본당의 소통
교황청 훈령에서도 언급하듯이, 본당위원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본당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요구와 의견을 수집하고 시노드의 다른 기관들에 전하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도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하여 구역, 반모임, 소공동체 등이 활용되고 이를 통하여 수집된 의견이 본당 사목평의회에 전해집니다.
반대로 본당의 중요한 일이 사목평의회에서 각 구역, 반, 신심단체, 제단체에 전해지듯이 시노드의 각 기관들에서 필요한 교육과 자료수집, 다양한 봉사 등이 본당위원회를 통하여 요청될 것입니다.
이렇듯 본당위원회는 시노드 기간 동안 교구와 본당을 연결하는 소통의 창구가 될 것입니다.
3. 본당 전 구성원의 영적 성숙과 쇄신을 위한 지원
시노드 동안 본당에서 교육, 회의, 설문조사, 행사 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 또한 그 목적은 본당의 복음화를 위한 쇄신과 영적 성숙, 구성원 전체의 친교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당위원회는 단순히 시노드를 위한 행정적인 업무만을 처리하는 사무기관이 아닌, 본당의 복음화에 봉사하는 지향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특별히 현재 한국 교회가 직면한 실재적인 문제들(교회에 대한 다양한 도전,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운 여러 조건들, 쇄신이 필요한 영적 나태함 등), 그 해결을 위해 모색될 방안들 등, 시노드를 통하여 수렴될 여러 영적 차원의 요구들이 본당위원회를 통하여 본당 모든 구성원과 함께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당위원회는 본당의 영적 성숙과 쇄신을 위하여 봉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24)>
의리와 비리의 차이
어느 책에서 영국의 재상이었던 '디즈레일리'와 그 부인 '매리인'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소개해 봅니다.
디즈레일리보다 열두 살 연상이었던 매리인은 무식했습니다. 모임에서 사람들이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 매리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걸리버, 그 사람 참 재밌는 사람인 거 같은데 한번 초대하죠. 주소를 알려 주시면 초대장은 제가 보낼게요."
어느 날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어울리지 않는 여자와 결혼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디즈레일리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지금의 나라면 많은 여자가 관심을 보였겠지만 결혼할 당시의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떨어진 초라한 사람이었다. 그때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은 이 여자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함께한 사람이 최고의 동반자라는 '의리'있는 선택은 단지 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서로의 머리맡에 사랑과 신뢰로 가득찬 편지들을 매일 적어 두며 살았으니까요.
살다보면 꼭 아쉬울 때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소 연락 한 번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친분을 과시하며 다가오는 사람들... 속이 훤히 보이는데도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 채 다른 사람이 자신의 미소에 잘 속아 넘어가고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
한때 분명 친구였는데 사실 이제 와서 서로 진짜 친구는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때문에 언론이 시끌시끌했습니다. 그들을 보면 의리가 아니라 비리로 맺어진 친구 사이의 끝은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 잘 알 것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고,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복잡한 계산을 하느라 분주한 '비리파' 친구보다, 만남 그 자체에 기뻐하며 가면 없이 언제나 맨 얼굴로 만나러 나오는 '의리파'친구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세고 계시는 주님 앞에 얕은 속셈은 너무도 쉽게 드러나는 죄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계절의 언덕에서
예쁘게 살아낸
별 닮은
단풍잎 하나
눈 맞춤 인사를 한다.
"저 여기 있어요."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진리를 파는 가게 -앤소니 드 멜로-
간판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진리를 팝니다.':'각종 진리 일체'.
판매원 아가씨는 매우 예의 발랐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전체 진리를 찾으세요?"
"전체 진리, 그럼요, 전체 진리를 보여 주시오.
속임수는 필요 없소, 변명도, 합리화도, 평이하고도 명료한 나의 진리, 그게 내가 바라는 거요."
아가씨는 가게 안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그쪽이 전체 진리를 파는 곳이란다.
그곳 판매원은 안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정찰을 가리켰다.
"값이 몹시 비싼데요. 선생님."
"얼마요?"
값이야 얼마든 전체 진리를 얻고야 말리라고 마음먹고 나는 물었다.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은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싼 값으로 오롯한 진리를 얻을 수 있을 줄로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도 나는 진리를 위하여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기는 커녕 걸핏하면 평온과 안일을 갈구하고 있고, 아직도 나 자신을 두둔하고 합리화하여 조금씩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있으며, 아직도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한 나의 믿음들이라는 은신처를 찾고 있다.
-종교 박람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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