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연중 제 15주일 2016년 7월 10(다해)

모든 2 2016. 7. 10. 22:00

선화동 성당(대전 중부지구)

본당 설립 : 1977.10.5 /주보성인 : 성 김대건 안드레아

 

+ 루카 복음.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말씀의 향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 최익선 그레고리오 공주교동 주임

 

  요즘 세상에 "따뜻한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일 터져 나오는 안타깝고 무섭고 흉측하고 두려운 사건들 속에서 따뜻한 마음들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게 되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준비해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탐욕스러운 재벌과 권력이 만들어 놓은 어두운 사회 현실, 그 한가운데서 작지만 힘있게 솟구쳐 오르는 일반시민들의 따스한 행보는 어두운 현실 속에 감지되는 구원의 하느님께서 역사하고 돌보고 계시다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이 나라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대화에 이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반문하셨고, 율법교사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반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따뜻한 행보에 눈을 돌리도록 하시고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십니다.

 

  대전교구는 교구설정 70주년을 향해 나아가면서 오늘의 사회 현실 속에 교회의 역할을 되짚어보고 세상과 인류구원과 교회쇄신을 위한 행보로 교구 시노드를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회 현실과 교회 현실을 각계각층으로부터 들어보고 현실을 진단하며 그 대비책들을 찾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신앙인들인 우리 자신들이 무엇보다 먼저 사회현실과 교회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로 보기 위해선 우리 눈에 자신도 모르게 덧씌워진 너울들을 벗어버리고 복음적인 눈, 예수님의 눈을가져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늘 그렇듯 혼이 빠져 있는 눈, 마음의 움직임을 잃어버린 눈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힘을 가져다줄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당신의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의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로 거룩함의 눈을 가진 사람들로 보이지만 생명과 구원의 대상인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눈은 감추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냉대와 천시의 대상이 되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참으로 따뜻한 마음, 자비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보에 눈을 돌리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 따뜻한 눈, 바로 예수님의 눈이요 이 시대 우리가 갖추어야 할 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두움과 교회의 위기를 운운하기 앞서 이미 복음적인 눈, 예수님의 눈에 더더욱 가까이 다가서서 세상을 직시하고 대응하는 오늘날 일반 시민들의 눈이 우리 교회의 눈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전교구 시노드가 성령의 이끄심 아래 결실을 잘 맺어가길 함께 노력합시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6)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⑤ 장주기 요셉 회장

  성인전을 읽다 보면 큰 병에 걸렸을 때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분들을 종종 본다. 장주기 요셉회장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본래 신자가 아니었던 그는 26살에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대세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한 친척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알고는 있었지만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삶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중병에 세례를 받았을 지라도 자기 이마에 흘러내린 물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모두 신앙으로 이끌었고, 신심과 열성이 뛰어나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그 직무를 계속하였다. 그의 가족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떠돌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에 정착한 곳이 산골 깊숙이 자리한 배론(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이었다.

 

  1855년 잠시나마 박해가 잠잠하던 때에 조선 교회는 배론에 신학교를 정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장주기 회장은 자기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내주었고, 집주인으로서 또한 배론 교우촌의 회장으로서 신학교 운영을 뒷바라지 하였다. 그렇게 10여 년 넘게 헌신하고 있을 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당시 장주기 회장은 64세의 노인이었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배론에는 프랑스 선교사 2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자 장주기 회장은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푸르티에 신부가 장주기 회장을 풀어달라고 부탁하였으므로 그날 체포되지는 않았다.며칠 후 다시 포졸들이 인근 마을에 들이닥쳤을 때 그곳에 있던 장주기 회장도 체포되어 제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는... 제천으로 옮겨와 살면서 배우고 익힌 것이 곧 대군대부(大君大父)의 성교(聖敎, 거룩한 교회)입니다. 비록 만 번 형벌 아래 죽더라도 만 번 하느님을 배척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모든 처분을 달게 받으며 늦었지만 모든 죄를 인정합니다. 잘 헤아려 처리해 주십시오."

 

  그가 배론에 있던 선교사들보다 늦게 체포된 것이 오히려 다블뤼 주교 일행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으로 보내져 처형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동행했다. 그래서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우연히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동행했던 것처럼 장주기 회장도 성 금요일에 동료 순교자들을 따라 그 길을 함께 갔다. 그는 순교 직전에 좌우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이 성교(聖敎)에 영광이라."라고 말하며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김정환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17)>

 

반쪽 참회는 이제 그만

 

이웃을 거쳐야 만나는 하느님

 

   자주 접하면서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것이 가끔 생소하게 보이거나 들릴 때가 있습니다.

지난 번 주일 미사 때가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여느 때처럼 미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께서 일주일 동안 지은 우리의 죄를 반성하는 고백의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매주 듣게 되는 익숙한 기도문이라 거의 습관적으로 따라하곤 했는데, 그날은 신기하게도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라는 부분이 매우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이 제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죄를 하느님께만이 아니라 형제들에게도 고백하는 이유가 관연 무엇일까? 진정한 참회는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내 죄를 형제들에게 고백하는 일과 하느님께 고백하는 일 가운데 어떤 쪽이 더 어려울까?

 

   생각해 보니 사실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기보다 형제들에게 고백하는 일이 더 어려워 보입니다. 일방적 관점으로 이웃들을 판단했고, 날카로운 말로써 상처를 주었으며, 배려 없는 행위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노라고 고백하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할까요?

 

   "참회의 시작은 형제들에게서 시작되어 하느님에게서 완성된다. 형제들에게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는 기도는 하느님께 그저 공허한 소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느님께만 기도드리면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던 제가 참 부끄러워졌습니다. 매주 반쪽짜리 참회의 고백을 하면서도 염치없이 영성체를 모신 제가 참으로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성당에 와서 하는 고백은 때늦은 고백입니다. 이제라도 일상에서 형제들을 만나면 눈으로 먼저 인사하렵니다.

미안하다고, 겸손하지 못했다고,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탓이라고..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문득 내다본 창에서

숲에로 난 깊은 길을

보았습니다.

새들이 낸 그 길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맑은 마음을

참 행복을 들으며

그 길을 매일 아침

바라봅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마당>

 

습관이 주는 선물

 

  가족들의  옷을 몇 가지 준비하러 가게에서 옷을 사고 계산을 하려는데, 가게 주인의 손목에 찬 묵주 팔찌가 우연히 눈에 들어와 "묵주 하셨네요?"하고 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주인은 "요즘 냉담 중이고 아직 견진성사도 못 받았어요."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왠지 그분의 상황을 조금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당에는 못 나가도 가게에서 매일 미사 책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는 그분의 말에 습관처럼 가방에 넣고 다니는 매일미사책을 꺼내서 건넸습니다. 책값을 주시는데 괜찮다고 받지 않으니 내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그러고나서 매일미사책을 사러 근처 성당에 갔더니 점심시간이라 살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때마침 아들아이 중학교에서 학교 일 때문에 만난 자매님이 생각과 어렵게 전화를 걸어서 부탁을 했더니,너무도,고맙게 매일미사책을 구해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분의 작년 8월부터 냉담 중이었는데 매일미사책을 사러 갔다가 신부님을 뵙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자매님을 보시더니 오랜만이라고 하시면서 매일미사책은 없지만 어느 분이 매일미사책을 사다 달라고 했는지 그분께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냉담 중인데 매일미사책을 사다달라고 했을 때, 사러 가는 마음은 편하지 않으셨을 것 같았습니다.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을 텐데 그분의 배려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매일 미사 책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고 있던 그 다음날 아침 일찍 그 자매님께서 다른 성당에서 구매를 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더 감사한 것은 그분도 한 권을 구매해서 좋았다는 말에서 기쁨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은 기쁨과 작은 선물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니 너무도 많은데 그것을 잊고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햇살처럼 다가오는 소중한 시간과 , 우리의 마음속에 고단과 힘듦이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과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이, 습관이 주는 선물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모두 행복한 마음에 평화가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지경남 파우스티나/온양신정동성당-

 

 

손자병법 36계

 

* 승전계(勝戰計) :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을 말한다.

 

제1계 만천과해(瞞天過海)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넌다.

 

제2계 위위구조(위위구조)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

 

제3계 차도살인(차도살인)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치다.

 

제4계 이일대로(이일대로)

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운다.

 

제5계 진화타겁(지화타겁)

상대의 위기를 틈타 공격한다.

 

제6계 성동격서(성동격서)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으로 공격한다.

 

* 적전계(적전계) : 아군과 적군의 세력이 비슷할 때 기묘한 계략으로 적군을 미혹시켜 승리를 이끄는 작전이다.

 

 

제7계 무중생유(무중생유)

지혜로운 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제8계 암도진창(암도진창)

기습과 정면 공격을 함께 구사한다.

 

제9계 견안관화(견안관화)

적의 위기는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제10계 소리장도(소리장도)

웃음 속에 칼이 있다.

 

제11계 이대도강(이대도강)

오얏나무가 복숭아를 대신해 죽다.

 

제12계 순수견양(순순견양)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간다.

 

제13계 타초경사(타초경사)

풀을 헤쳐 뱀을 놀라게 한다.

 

제14계 치시환혼(차시환혼)

죽은 영혼이 다른 시체를 빌려 부활한다.

 

제15계 조호리산(조호리산)

호랑이를 산속에서 유인해 낸다.

 

제16계 욕금고종(욕금고종)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 준다.

 

제17계 포전인옥(포전인옥)

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는다.

 

제18계 금적금왕(금적금왕)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는다.

 

* 혼전계(혼전계) : 적이 혼란한 와중을 틈타 승기를 잡는 전략이다.

 

제19계 부저추신(부저추신)

가마솥 밑에서 장작을 꺼낸다.

 

제20계 혼수모어(혼수모어)

물을 흐려 놓고 고기를 잡는다.

 

제21계 금선탈각(금선탈각)

매미가 허물을 벗듯 위기를 모면하다.

 

제22기 관문착적(관문착적)

문을 잠그고 도적을 잡는다.

 

제23계 원교근공(원교근공)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나라를 공격한다.

 

제24계 가도벌곽(가도벌곽)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시킨다.

 

* 병전계(병전계) : 상황의 추이에 따라 될 수 있는 우군을 배반, 이용하는 전략이다.

 

제25계 투량환주(투량환주)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빼낸다.

 

제26계 지상 매괴(지상 매괴)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한다.

 

제27계 가치부전(가치부전)

어리석은 척 하되 미친 척하지 마라.

 

제28계 상옥추제(상옥추제)

지붕으로 유인한 뒤 사다리를 치운다.

 

제29계 수상개화(수상개화)

나무에 꽃을 피게 한다.

 

제30계 반객위주(반객위주)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한다.

 

* 패전계(패전계) : 상황이 가장 불리한 경우 열세를 우세로 바꾸어 승리로 이끄는 전략이다.

 

제31계 미인계(미인계)

미녀를 이용하여 적을 대한다.

 

제32계 공성계(공성계)

빈 성으로 유인해 미궁에 빠뜨린다.

 

제33계 반간계(반간계)

적의 첩자를 역이용한다.

 

제34계 고육계(고육계)

자신을 희생해 적을 안심시킨다.

 

제35계 연환계(연환계)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결시킨다.

 

제36계 주위상(주위상)

때로는 전략상 후퇴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