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연중 제 17주일 2016년 7월 24일(다해)

모든 2 2016. 7. 24. 23:30

궁동성당(대전 북부지구)

본당 설립: 1994.8.1 /주보성인:성 김대건 안드레아

 

+ 루카 복음. 11.1-13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었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말씀의 향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정준섭 요셉 노인사목 전담

 

  오늘도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기도생활이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 감사하며 찬미하는 것이다.

  1) 하느님을 살아계신 아버지 하느님이시며 그분께  우리는 기도드린다.

  제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에 대한 내용이 아브라함과 하느님과의 대화형식을 통해 나온다. 하느님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없애 버리기로 하신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죄 속에 있고 서로 죄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죄의 온상, 전염병이 퍼지듯이 확산되는 죄의 뿌리를 없애시고자 결심하신다.

 

  그런데 "그 속에 의인들과 무죄한 사람들이 많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죄인들과 함께 멸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발생한다. 독서 안에서 아브라함은 끝까지 이 질문을 하느님께 하며 거래하듯 대화를 한다. "의인이 오십 명 사십 명 더 나아가 열 명이라도 있으면 멸하시겠습니까?"마치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거래하는 대화같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의인이든 죄인이든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마치 가족을 끌어 안고 버티는 아버지같은 아브라함의 절실함과 그 마음을 알면서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아픔과 애환이 잘 나타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마지막 장면은 하느님이 자리를 피하신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된다.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은 멸망을 미리 통고하며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재앙을 피하도록 도와주는 길뿐이다.

 

  2)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그분의 중재 안에서 기도한다.

  예수님 시대의 세상에도 구약 시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복잡한 세상이었다. 죄와 차별과 폭력과 고통 속에서 벽을 세우고 있었고 삶의 중심에서 밀려난 약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솟아오르는 시기였다. 이때 하느님이신 예수님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병자와 방황하는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치유와 용기를 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면서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며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보여 주셨다.

 

  3) 정열적으로 반복해서 포기하지 않고 하는 기도는 이루어진다.

  잠자는 사람이 문 차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어 문을 열어줄 만큼, 집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혹시 문이 부서질까봐 열어줄 만큼 세차게 적극적으로 하느님이 아시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께 구하고 있는 한 확실하게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실 것이고 그러기에 이미 기도를 통하여 간구하고 있는 주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이미 얻었음을 확신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으며,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현재 우리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8)

정의배 마르코 회장-바오로 사도 이해하기

 

    성경에 나오는 신비한 인물 중 한 분이 바오로 사도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철저히 박해하다가 회개하여 반대로 그분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사도로 바뀌었다. 그것도 한 때 그런 것이 아니라 '달린 길을 다 달려'죽음에 이를 때까지 한결같이 예수님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무엇이 계기가 되었을까?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오늘 소개하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이 그 의문을 풀어준다.

 

  정의배는 1795년 서울 창동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문에 능통했기에 작은 서당을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며 생활하였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패륜집단으로 생각했고, 박해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희한한 일을 보았다. 그가 44살이던 1839년 9월 21일, 그날은 한강 새남터에서 프랑스 선교사 세 명이 처형되는 날이었다. 정의배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선교사들이 기뻐하며 순교하는 장면을 보고는 너무나 이상하게 여겼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기뻐하며 죽을 수 있는가?

 

  그날을 계기로 정의배는 천주교 신자들을 수소문하여 교리책을 구해 탐독하였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전에는 천주교인이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천주교인이 되어야 정말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입교하여 영세를 받았고,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기 가족들뿐만 아니라 예비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방문하였다. 또한 고아들을 양육하는 성영회(聖嬰會) 사업이 시작되자 여러 아이들을 입양하여 집에서 돌보아주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났음으로 회장으로 임명되어 선교사들을 도우며 평생을 가르치고 봉사하는 일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정의배 회장은 어떤 사람의 밀고로 일찌감치 체포되었다. 나이가 이미 71세에 이르렀으므로 포졸들은 그를 묶지 않고 정중히 모셔갔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였기에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런 가운데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정의배 회장은 3월 11일 군문효수형으로 칼을 받아 처형되었는데, 그 장소는 옛날 선교사들이 기뻐하며 죽음을 맞이한 한강 새남터였다.

 

  정의배 회장이 바오로 사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장면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를 목격하는 장면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죽임을 당하는 장소에 바오로 사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바오로)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사도 7,58) 그때 바오로 사도 역시 정의배 회장처럼 무엇인가를 보았고, 그것이 결구 바오로의 회심으로 이어졌다고 나는 이해한다. 71 세의 노인 순교자가 '달릴 길을 다 달리며' 가르쳐 준 선물이다.

-김정환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19)>

 

연민은 피보다 진하다

어떻게 남의 일입니까?

 

 

아기를 가졌을 때에는

유모차 안에서 잠든 갓난아이만 봐도 내 아이처럼 사랑스럽고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교복 입은 아이들은 모두 내 아이처럼 귀엽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나면

지나가는 군인들이 모두 내 아들로 보이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길을 걷다 마주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내 부모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하고 여쭤 보면

 

가끔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구먼"이란 대답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남의 아기가 아프면

내 아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내 일처럼 마음 짠하고

 

신문에서 학생들의 사고 소식을 접하면

마치 내 아이 일처럼 안타까움에 애를 태우고

 

노인분들이 힘겹게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게 되면

언젠가 내 부모님도 그러실 것 같아 슬퍼지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살던 청년이

지하철 안에서 삶을 마감했을 때에도

그 청년은 결코 누구의 청년이 아니라

우리의 청년임을 우리 마음이 먼저 느낍니다.

 

그러니 아무리 1%의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위선적'이라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피보다 진한 '연민'을 결코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눈이 부신

오늘은

 

이 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결정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한국 천주교회는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결정이 초래할 상황을 주시하고, "평화는 결코 '무기의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상호신뢰에 의해 확립된다."(「지상의 평화」,110,113항 참조)고 하신 요한 23세 성인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아래와 같이 교회의 입장을 표명한다.

 

  1.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에 대한 우려

  2016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재의 지구촌 상황이 이른바 '산발적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만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규정하신 바 있다. 인종, 민족, 국가, 종교 간 갈등이 점차 심화되는 현실에서 강대국의 충돌 지점에 우치한 한반도의 평화 유지가 갖는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권 방어에 대한 현실적 실효성조차 확보하지 못한 사드 배치는 한반도가 새로운 냉전체제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교회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오로지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도 없다."(사목헌장 78항)고 천명한다. 군사력의 증강을 통해 한반도의 위기가 진정되고, 평화가 오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질서의 확립을 통해 이룩된다.

 

  여러 차례 주장한 바와 같이 핵개발은 북한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이로 인한 강대국 간의 긴장 고조가 민족의 공동선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북한의 핵을 저지하기 위한 사드 배치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군비경쟁이 인류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안겨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지성과 감성의 교류와 공감이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현장도 경험하였다. 한반도의 핵문제를 둘러싼 긴장과 위기는 군사력의 우위를 과시하는 압박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2. 민족 화해 분위기의 냉각에 대한 우려

  지정학적 특성과 강대국들 간의 이념적 대립으로 분단된 한반도는 분단 71년의 역사 속에서 위기를 평화로 이끌어가기 위한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7.4 남북 공동성명'(1972), '남북 기본합의서'(1992), '6.15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노력의 귀중한 결실이다. 최근의 신무기의 추가적 개발과 배치는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점에서 그간의 모든 민족화해와 공동번영 노력에 역행하는 일이다.

  최근의 남북 관계는 개성공단의 폐쇄로 큰 시련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드 배치로 인해 주변국 간의 긴장과 적대감이 증가된다면 남북 협력과 대화의 길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이에 교회는 정부 당국이 한반도를, 패권이 충돌하는 위험 지대가 아닌 화해와 협력의 상생 지대로 변화시켜가는 노력을 경주해 줄 것을 촉구한다. 힘이 아닌 설득과 대화를 통해 핵 포기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전방휘적으로 노력해 줄 것을 간절히 촉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한 중 청와대 연설에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외교는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끝없는 도전이며 가능성의 예술"이다. 진정한 평화는 상호 비방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인내를 수반하는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정부 당국이 평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 주기를 거듭 촉구한다.

 

  3. 민생 불안과 부담 증가에 대한 우려

  한국 천주교회는 사드 배치가 어려움에 처한 한국 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아울러 교회는 균형 있고 절도 있는 군비 축소와 대화 협력을 통해서 궁극적인 평화 실현과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또한 교회는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이다."(「민족들의 발전」,76장)라고 선언한다.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을 인간적인 환경으로 이해키는 발전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후 국제 갈등으로 인해 남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악화될 경우 평화 실현은 더욱 힘들어지리라 예상된다.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위기는, 자신에게 살생의 무기를 들이대고, 자기 화살을 불화살로 만드는 (시편 7,14) 우를 번하지 않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이사 2,4)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임을 보여준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한반도의 평화가 군사력의 우위로 이룩될 수 없으며, 민족 간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한 걸음씩 진행되어 나아가야 함을 실증해야 할 시점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는 한반도의 군사적, 경제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드 베치를 강행하려는 현재의 상황에 심각한 우려와 함께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다.

 

  사드의 효능도 검증하지 않은 채 사드 배치를 강행하여 국민들에게 불신과 불안을 안겨 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커다란 외교적인 손실을 입게 될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위한 환경평가를 거치지 않은 채 강행하는 사드 배치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고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증진시키는 방안을 모색해 주기를 간절히 촉구한다.

 

2016년 7월 15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

 

 

의인 열 명을 보아서

 

의인 열 명

 

   이런 사람의 훌륭함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참아 주시게 한다는 증거를 보고 싶으면,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성조[아브라함]에게 무어라고 하시는지 보십시오.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성읍을 파멸시키지 않겠다.' 제가 '왜 의인 열 명'이라고 합니까? 그곳에서는 의인 롯과 그의 두 딸 말고는 불법을 행하지 않은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아마도 남편 덕분에 도성이 받는 벌을 피했지만, 말씀을 소홀히 새겨 나중에 벌을 받은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그때는 하느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 덕분에 종교의 성장이 이루어지던 시대였기에, 하느님께 겸손하게 호소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도성들 안에도 있었고, 언덕과 동굴들에도 있었습니다. 이런 소수의 덕 덕분에 사악한 다수가 벌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그지없으며, 그분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의인들을 보아서 많은 이에게 구원을 내리시는 때가 많습니다.

제가 왜 '얼마 안 되는 의인들을 보아서'라고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현세에서 의인을 찾으실 수 없으면 세상을 떠난 이들의 덕을 보아서, 살아 있는 자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시는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2 열왕 19,34).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을지라도 그분은 구원하십니다. 그분은'[그들이] 구원을 보이는 것은 나의 습관이며, 나는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재앙에서 구하는 데 재빠르므로, 나 자신 때문에, 그리고 나의 종 다윗 때문에, 나는 방패가 되어 준다.

자신의 무관심 때문에 희생된 자들이 오래전에 이승을 떠난 이들 덕분에 구원받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그리소스토무스<창세기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