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4년 주보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2024년 4월 21일(나해)

모든 2 2024. 4. 23. 14:35

 

매곡리공소(모산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2022년

 

 

+ 요한 복음 10,11-18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은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말씀의 향기>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 김윤식 루카 성소국장

 

  오늘 성소 주일은 신자 개개인의 성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제 성소, 수도 성소를 기억하고 기도 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뜻대로 부르신 것을 성소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사제와 수도자로 불러 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려는 사람들을 향한 날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기만 하실 것이 아니라 강제로 시키시면 어떨까? 그럼 이 세상이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여 가지 않을까? 사람들의 뜻을 존중하신다고 아담과 하와에게 선택권을 주시어 원죄를 짓게 만드셨을까?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으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들은 낙원에서 편히 지내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들은 종종 신자들의 입을 통해, 때로는 예비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기도 합니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느님께서 강제로 시키시기만 하셨다면 우리의 삶은 노예의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강제로 시키고 그 강제된 삶을 억지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노예지 자유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노예로 삼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도록 초대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 느님의 양들처럼 울타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 주님을 알아뵈올 때 우리는 하느님 아래 한 양 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이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에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선교사명을 이어가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안에서 성소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이 응답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오늘 특별히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를 위한 날이니, 사제 성소자들, 수도 성소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십시오. 성소자들을 위한 기도로써,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자신의 성소를 알아채지 못한 성소자들에게 응답을 권유하는 모습으로써, 성소자들이 가는 길에 묵묵한 봉사로써, 사제 성소자들, 수도 성소자들이 자신들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아버지께 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부르심에 목숨을 내놓는 응답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의 부르심에 순순히 그리고 자유로이 응답하며, 성소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자신의 의지를 다하여 응답해 가는 길에 협력하는 부르심에도 잘 응답하였으면 합니다.

 

 

함께 걷는 신앙 여정

 

첫 번째 에피소드 합덕성당

 

  이번 회부터 4회에 걸쳐 4개 본당에서 협조해 주신 7분의 아름다운 신앙 체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함께 걷는 신앙 여정』의 취지와 목적에 따라 전체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유의미한 내용들을 찾았지만 동시에 통계와 수치만으로는 정형화하기 어려운 개인 체험과 본당 공동체의 내적인 힘을 파악하기 위해 개별 인터 뷰도 진행하였습니다. 오늘은 합덕성당의 이 데레사 자매님, 김 다니엘 형제님과 나눈 대화 내용 일부를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Q)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사 전례와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데레사 자매님 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뛰놀았던 장소가 성당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 전례가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지요. 비록 무엇을 배웠는지 구체적으로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삶의 기억들이 제게 커다란 힘이 되었어요. 그래서 중간에 잠시 쉬었던 기간이 있었음에도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Q)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힘을 얻고 있는 기도 생활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 데레사 자매님 저는 매일 묵주기도를 봉헌합니다. 그 기도 지향 안에는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청원하는 내용도 있고, 감사의 내용도 있어요. 특별히 남편의 병환을 겪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께 맡기게 되었는데 그때 의탁이라는 의미를 조금 배운 것 같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시도록 맡기는 것이지요. 신부님 강론 말씀으로 매주 힘을 얻고 있는데, 청원 기도만이 아니라 감사 기도의 중요성을 배웠고 그것을 생활하면서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게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고 있습니다.

 

Q)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당 내 여러 교육 프로그램(예비신자 교리, 성경 공부, 주일학교, 노인대학, 기타 교육 등) 혹 은 피정을 해보셨을 텐데 그중 가장 와닿았거나 도움이 되었던 것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 다니엘 형제님 저는 1981년 부모님이 천주교로 개종하신 이후 함께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꾸준히 해올 수 있었는데요, 꾸르실료 교육을 가보라는 소개를 받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 삶은 온전히 변하게 되었는데 삶의 희노애락 가운데 늘 주님을 찾게 되었고 힘도 얻게 되었습니다. 또 여러 교육 프로그램도 제 신앙생활에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매주, 또 평일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통해 활력을 얻고 있습니다.

 

Q) 신앙생활 중에서 사제, 수도자, 혹은 교우들로부터 위로받은 경험이 있으십니까?

     김 다니엘 형제님 제가 위령분과장으로 봉사할 때 주임신부님께서 따뜻한 말씀으로 격려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수고했다는 말씀 하나가 함께 봉사하는 이들에게도 위로가 되었고 저희가 하는 위령봉사의 의미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분이 위령분과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장례 절차 안에서 유가족 중 쉬는 교우분들이 이 계기를 통해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시는 경우들이 많고 또 장례미사를 통해 우리 신앙의 의미와 목적지, 삶의 다짐을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노드사목연구소-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78. 미사 해설 - 마침 예식(1) : 마침 예식의 의미

 

  시작 예식을 통해 거룩한 만찬이 시작되었고,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해 영육 간에 힘을 얻는 하느님 백성은 미사의 마지막 부분인 마침 예식에 참여 후 다시 우리들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침 예식에서 중요한 것은 사제의 강복입니다. 우리는 강복을 받음 으로써 신앙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으로 전환되었으며, 제자들을 굳센 신앙으로 변하게 하시어 신앙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선물은 제자들에게 평화와 함께 성령을 주시는 데(요한 20,21-22), 마침 예식의 강복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신 모습으로 드러납니 다. 또한 강복의 의미는 영원한 삶을 간구하는 그리스 도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활력을 주고, 세상을 위한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애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침 예식은 단순히 전례의 마침표를 찍는 차원이라기보다는 파견의 의미로써 새로운 시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 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은총이기도 합니다. 어제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서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주님과 함께 재시작한다는 점은 마침 예식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를 통해서 다시금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이러한 희 망을 통해 신앙적인 삶을 새롭게 할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마침 예식은 미사에서 얻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을 통해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도 그 은총이 확대되어 우리가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강복과 파견으로 이루어진 마침 예식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거룩한 이 시간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 지도록 주님의 힘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마침 예식을 거행하도록 인도합니다.


90. 마침 예식은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 필요하다면 공지 사항을 짤막하게 알린다.

㈁ 사제는 인사와 강복을 한다. 강복은 어떤 날이나 특별한 경우에는 백성을 위한 기도나 장엄강복을 더 성대하게 할 수 있다.

㈂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 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 사제와 부제는 제대에 입을 맞춘다. 그 다음에 사제와 부제는 물러나서 봉사자들과 함께 제대에 깊은 절을 한다.

 

-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글로 만나는 성화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30~1479)는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르네상스 예술의 대가였다. 그가 1476년에 그린 ‘성모영보’ 작품은 이탈리 아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성모 영보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 탄생의 일화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그의 작품은 성모영보 안에서 마리아가 겪은 모든 감정 단계(혼란, 심사숙고, 물음, 순명, 공로)를 요약하여 보여주기에, 이 작품을 보는 관람객은 성모영보에 대해 묵상할 기회를 얻는다.

 

  안토넬로의 성모영보는 다른 성모영보 작품처럼 마리아의 동정을 의미하는 울타리가 쳐진 정원이나 수선화, 성령의 빛도 표현되지 않으며, 천사 또한 작품에 없다. 작품 속의 마리아는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정면을 바라본다. 우리 또한 이 작품 속의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모습에서 상반된 것을 발견한다. 마리아의 오른손은 천사의 예고에 놀라움을 표현하지만, 반대로 푸른색 베일을 잡은 왼손은 그 예고를 받아들임을 드러낸다. 또 한 마리아의 오른쪽 눈은 순명을 나타내지만, 왼쪽 눈은 본인은 처녀로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천사에게 묻고 있음을 드러낸다. 마리아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베일에서 볼 수 있듯이, 이분법적이면서도 동시에 합성적인 이 마리아는 성모영보의 서양식 이콘이라고 불린다.

 

  안토넬로가 표현한 뒤집힌 반대 관점은 신비의 수용자인 우리를 마리아 앞에서 주님의 탄생을 예고하는가 브리엘 천사 자리에 두게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랫부분을 잠시 본다. 마리아 앞 책상 위에 놓인 독서대의 책이 가만히 있지 않고, 성령의 바람에 의해 책의 장들이 들어 올려진다. 곧, 마리아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주님 탄생 예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동시에 독서대의 구석은 이제 우리가 마리아와 이야기할 차례라고 가리킨다.

 

  우리는 4월 8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여, 안토넬로의 성모영보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마리아의 신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권영명 안드레아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겸 솔뫼 교구역사관 관장-

 

 

성지를 걷다 - 여사울 성지(3)

 

3. 이존창 루도비꼬를 보며 지금의 시대에 전하는 바를 생각해 본다.

 

  1. 만민평등사상을 실천하며 신앙을 전파하였다. 한학자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천주교가 양인 평민, 천민, 남녀노소 구분없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삶을 통하여 증언하였다. 갑질과 왕따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지금의 사회에서 차별이 당연시되던 신분사회인 조선사회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일들이 아니겠는가? 여사울이라는 명칭이 예수골, 여수골에서 왔다는 전승을 보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신앙촌이 형성되었고 그렇게 살아왔음을 증언해 준다.

 

  2. 가성직자제도에서 사제의 역할을 수행한 이존창에 의해서 많은 이가 신앙을 접하였으며, 그렇게 전파된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지거 등을 보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제 양성을 위해서는 신앙을 가지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 그리고 공동체의 모범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성소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소명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 '성소'()입니다.

 

  성소는 넓은 의미의 성소와 좁은 의미로서의 성소로 해석됩니다. 혼인 생활, 직업 등 각자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행위는 넓은 의미에서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부모로, 어떤 이는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군인으로 또 예술가로서의 성소를 받습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성소는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로 규정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축성되며, 수도자들은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따라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한다."(마태 5,48)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를 결정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으로부터 성소 생활을 원해야 하며, 두 번째는 교회가 인정하는 장상이 성소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특정한 방향이나 사명으로 불리는 모든 것을 성소라고 지칭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모세, 예레미야도 성소를 받았습니다. 이들을 향한 거룩한 부르심을 통해 성소는 개인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경 정당

 

+ 찬미 예수님

 

EU, 영국, 독일은 녹색당이 존재감이 큽니다. 유럽의회에서는 전체 의석수의 10%를 차지할 만큼 큰 정당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

 

  사실 기후 위기에 대한 정책은 정쟁이 대상이 아닙니다. 전 지구적인 과제이죠. 그런 의미에서 초당적인 관심으로 기후 위기를 바라보고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고 실천하는 노력을 보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나라 환경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녹색 정의당은 하나의 의석수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3%도 얻지를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긴 역사를 가진 유럽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안타까운 현실인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세상의 것에만 외칠 매체 속에서 환경과 지구의 어려움을 말해 줄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는 현상이 안타깝습니다.

 

  * 고마운 사람들: 4월 13일 본당에서는 갑천 일원에서 줍깅 행사를 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대건회, 요셉회 회원들과 사목회장님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3월 9일에는 성모회, 모니카회에서 줍깅에 참여해 주셨는데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