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 한금순 카타리나(당진본당)
표지 공모전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 요한 복음 15,9-17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 들을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서로 사랑하여라."
<말씀의 향기>
“서로 사랑하여라” - 박성민 요한금구 법동 주임
오늘 전례는 사랑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의 종류와 사랑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단순하게 이기심과 탐욕을 좇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전혀 사심 없는 사랑도 있고, 또 전적으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이 있는가 하면 내적이며 영성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잊으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은 또 그 특성에 따라 여러 용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오늘 둘째 독서와 복음에서 성 요한은 그리스도교 사랑의 고유한 특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세상을 위해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 안에서 사랑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르게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기원과 기준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단순하게 그냥, 혹은 내 기준으로 되받을 것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실천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라, 계명이며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주님을 알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참된 봉사와 사랑으로써 그분의 계명을 충실히 지킬 때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사랑의 반영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도 흘러넘쳐야 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사랑을 우선적으로 실천하는 것,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 희생과 헌신을 실천하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하는 것, 배신당하지만 사랑을 믿는 것, 이것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셨듯이, 신앙인들도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은 날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성찬례가 되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함께 걷는 신앙 여정
세 번째 에피소드 홍산 성당
오늘은 홍산성당의 남 카타리나 자매님, 양 요한 형제님과 나눈 대화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Q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사 전례와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양 요한 형제님 저는 세례를 조금 늦게 받은 편입니다. 원래 개신교에 다니다가 사촌 동생 신부님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거룩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또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해 하느님 은총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본당 관할 구역 내 은곡 공소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홍산본당과 약 12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나이가 많고 거리상 어려움 때문에 평일미사 참례는 어렵지만 주일미사는 본당으로 가면서 신앙생활의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주일미사를 참례하러 가기 전의 준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른 아침 세면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하느님을 뵈러 간다는 생각에 제일 깔끔한 옷을 입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모든 과정이 저에게는 기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Q 신앙생활을 하면서 개인과 공동체 신앙에 도움을 주었던 단체는 무엇이었습니까?
남 카타리나 자매님 저는 개인적으로 꾸르실료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도 제 나름대로 신앙생 활을 해왔지만 꾸르실료 교육 이후 삶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상, 순종, 사랑이라는 모토를 바 탕으로 신앙과 삶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을 구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교사회 활동을 통해 신앙이 더 굳건해질 수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안내하는 것 이전에 먼저 제 자녀를 보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신앙 적인 교육을 병행하는 것이 제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요즘 많은 가정에서도 그렇지만 부모님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같이 기도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안내해 줄 때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신앙에 맛을 들이고 습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신앙생활 중에서 사제, 수도자, 혹은 교우들로부터 위로받은 경험이 있으십니까?
양 요한 형제님 많은 분이 코로나로 고생하셨지만 저도 코로나에 걸려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또 저희 마을에 연로하신 분들이 많은 편이라 혼자 집에 있었던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하게 주임 신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음식과 위문품 등을 전달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는데 저에게는 너무나 잊지 못할 순간과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사가 가장 중요하지만 이번 계기를 통해 사제가 주는 위안이 신앙생활의 기쁨에 있어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 카타리나 자매님 저는 수녀님께 따듯한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몸이 좋지 않아 시댁으로 귀농 결정을 하고 많은 생각이 저를 힘들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수녀님께서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셨고 신앙 안에서 같이 기도하고 또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보자며 다독여 주셨습니다. 그 위로의 흔적이 지금 까지 제가 지치거나 힘들 때 하느님께 의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늘 수녀님도 건강하시고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면 좋겠습니다.
시노드사목연구소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79. 미사 해설 – 마침 예식(2) : 강복 (1)
마침 예식 140. 필요에 따라 사목 권고나 공지 사항을 짤막하게 한다. 강복 141. 그다음에 파견을 한다. 사제는 팔을 벌리고 교우들을 향하여 말한다.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사제는 교우들에게 강복한다.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교우들은 응답한다. ◎ 아멘. |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해 영육 간에 힘을 얻은 교우들은 미사의 마지막 부분인 마침 예식에 참여 후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돌아감, 파견은 마침 예식의 일부로서 “강복”과 “파견”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강복에 앞서, 본당 소식이나 간단한 공지사항은 마침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하게 되는데, 공지사항이 길어 미사의 은총을 감소시키는 내용을 공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지사항의 길고 짧음의 판단보다는 우리 공동체에게 필요한 소식에 함께 귀를 기울이고, 많은 관심과 기도를 하는 것은 공동체에 소속된 이들로서 합당한 자세입니다.
이어서 사제의 강복이 이어집니다. 교황과 주교님들은 오래 전부터 미사 끝에 강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미사의 한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우들이 퇴장할 때 그들 위에 십자 성호를 그음으로써 강복을 주었는데, 이는 현재도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의 행렬에서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교우들에게 강복을 줄 주교가 없을 때도 강복받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11세기에 사제들을 통해 강복을 주게 되었는데, 주교처럼 퇴장하는 동안 반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딱 한 번만 제대 위에서 하는 것으로 형식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강복의 모습은 1604년에야 비로소 예식화되었습니다. 강복 안에서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오는 거룩한 은총에 힘입어 교우들은 새로운 힘을 받아 살아갈 수 있도록 복을 받습니다. 강복을 받음으로써 신앙 안에서 우리는 새로워지고, 평화로이 우리의 삶을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강복의 특징입니다. 또한 세상을 위한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애정을 증명하는 표징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복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잘 살고, 부자가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아, 주님과 함께, 주님을 드러내며 살아갈 힘을 준다는 측면에서 강복의 올바른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1면 사진 설명
행복하여라 / 한금순 카타리나(당진본당)
요즘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는 흐름을 따라가기가 숨이 차서 ‘지금 난 행복한 건가?’ 란 생각조차 한가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난 늘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주님 안에서 감사하고 행복하게 지내려 노력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도, 주님을 몰라 찾지 않는 다른 사람도 삶이 의미 있기를,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들에 있는 모든 잡초가 각자 살아가는 의미가 있듯이......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79)
워닝 트랙
텔레비전으로 프로 야구 중계방송을 시청하다 보면 ‘워닝 트랙’(Warning Track)이라는 야구 용어를 종종 접하곤 합니다.
타자의 공이 외야 펜스(담장) 근처에서 수비수에게 잡힐 때, 중계진에 의해 주로 “워닝 트랙 앞에서 잡혔다.”라고 시청자들에게 전달됩니다.
‘워닝 트랙’은 야구 경기장 외야 펜스를 따라 마치 육상트랙이나 산책길처럼 약 3미터의 폭으로 잔디 대신 흙을 깔아 만든 길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이런 흙길이 생겨나게 된 배경에는 따뜻한 배려가 담겨있습니다. 야구 경기 중 만에 하나라도 발생할 수 있는 외야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외야수는 타자가 친 공을 잡아야 합니다. 외야 펜스까지 공이 날아가면 그 공을 잡기 위해 허공만 보고 전력 질주해야 하는데, 그때 펜스에 부딪히는 사고가 생길 확률이 높아집니다.
미국에서 야구 경기가 생겨나고 한참 성장하던 예전만 해도 외야 펜스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어서 외 야수의 충돌은 매우 치명적이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안전한 보호패드로 제작된 펜스를 사용하는 요즘에도 선수들의 충돌 부상이 종종 발생하고 있는 걸 보면 그 당시 얼마나 심각한 상황들이 벌어졌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런 안타까운 부상을 막기 위해서 선수들이 펜스를 향해 달려갈 때 펜스가 무척 가까워졌음을 미리 감지할 수 있는 일종의 안전 경고 장치로 마련된 것이 ‘워닝 트랙’이었던 것입니다.
외야수는 잔디가 아니라 흙을 밟으며 속도를 줄이기 시작합니다. 무조건 공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치지 않고 공을 잡는 것이 최선의 결과임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워닝 트랙’은 야구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치열한 현장 안에도 이쯤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워닝 트랙이 필요합니다.
승부보다 중요한 것은 ‘보호’입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한 과정’입니다. 그 어떤 것도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날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워닝 트랙’ 하나라도 고민하고 만들어 보는 날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 건양대교수-
성지를 걷다 - 정산성지(2)
2. 이도기 바오로의 삶과 믿음
‘청양다락골성지’에서 펴낸 ‘정산일기’에는 이도기 바오로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도기 바오로는 1743년 청양 수단리(현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박해를 피해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로 옮겨와 옹기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정산은 물론 논산, 홍주, 공주 등지로 복음을 전하며, 교우들의 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수많은 교우들의 순교가 이어지던 1797년, 이웃의 고발로 6월 8일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관리들이 벼슬과 음식으로 유혹하며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끝까지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정산 장날에는 치성장터에 끌려 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등에 북을 지게한 후 관중들이 뒤에서 쫓아다니며 두들 기고, 심지어 때리고 욕설을 하는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하였다. 1798년 음력 6월 10일에 장터에서 다시 배교하라는 강요와 가혹한 매질을 당하다가 하늘을 우러러 ‘아배(아버지)’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옥으로 옮겨진 이도기 바오로는 이틀 후인 1798년 7월 24일(음 6월 12일) 온몸이 망가진 채 옥담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향년 56세에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생명 주일
생명 주일은 생명, 특별히 인간 생명의 신비를 경축하고, 그 소중함을 되새기며, 보호할 것을 다짐하는 생명 주일입니다. 교회는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죽음의 문화'를 직시하면서 생명 존중과 보호에 앞장서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기를 바라며 아래와 같이 호소합니다.
1) 교회는 인간 생명을 소중한 부부 사랑의 결실이요, 하느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인간 생명은 결코 인간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인간 생명이 곳곳에서 위협받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2) 어머니의 몸 안에 잉태된 태아도 엄연한 인간 생명이기에 낙태는 심각한 죄악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강화되기를 거듭 촉구합니다.
3) 임신.출산 양육에 따르는 여러 어려움으로 낙태를 고민하는 이들의 고충과 아픔을 교회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임신과 출산이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축복이 되도록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4) 교회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의 사랑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주는 표지, 곧 성사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가정에 호소합니다. 가정이 본연의 자리를 되찾아 생명과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힘을 쏟아 주십시오.
꽃가루
+ 찬미 예수님
봄이 되면 황사, 미세먼지와 함께 꽃가루도 한 몫을 단단히 합니다. 꽃가루는 알레르기의 주원인으로 최근 10년 사이 알레르기 비염 증상은 4.4%, 아토피 피부염은 2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꽃가루 알레르기 증상으로는 충혈과 눈물, 맑은 콧물, 코막힘, 눈, 코, 입, 귀의 가려움, 피로감, 재채기 등이 있습니다. 성인 5명 중 1명꼴로 알레르기 비염 진단을 받고 있다고 하니 봄철에는 특히 신경 써야겠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옷에 묻은 꽃가루를 털어내고 꽃가루가 많은 낮에는 빨래를 밖에 널지 말아야 합니다. 호흡기가 예민한 분들은 외출 시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손 씻기 등과 같은 개인위생에 신경 써야 합니다.
실내 환경을 위해서는 공기청정기를 사용하고, 실내 물걸레 청소를 자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침구류는 최소한 일주일에 1번 60도 이상의 온수로 세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글, 사회 복음화분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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